창조와 혼란 그 사이
당신이 어릴적 마인크래프트에 처음 접속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광활한 세계, 아무런 목표도 지시도 없이 당신 앞에 펼쳐진 자연. 그곳엔 왕도 없고, 경찰도 없으며, 미션도 없다. 게임은 조용히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
이런 순간, 우리는 문득 아나키즘의 실천 현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가 명령하지 않는 세계.
법 대신 자율이, 통제 대신 창조가 중심이 되는 게임. 샌드박스 게임은 이러한 ‘권위 없는 공간’을 실험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철학적 실험실이다.
우리가 샌드박스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명확한 목표가 없거나, 있어도 강제되지 않으며, 유저가 직접 게임의 룰을 정의하고,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개발자가 제공한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유저는 거의 ‘창조자’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구조는 아나키즘의 철학적 기반과 맞닿아 있다. “권위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샌드박스 게임은 바로 이 질문에 답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예가 마인크래프트(Minecraft)다. 이 게임은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성’조차 없다. 목표가 없고, 클리어도 없고, 보스조차 필수가 아니다. 대신 주어진 것은 도구와 자유, 그리고 공간이다.
유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부술 수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수많은 가능성과 창의성은 “무정부적 상태는 혼란만을 낳는다”는 전통적인 편견에 도전한다.
샌드박스 게임은 권위 없는 질서를 실현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유저들은 공동의 구조물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협업하며,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간다. 자율적 공동체, 즉 아나키즘이 추구해온 사회의 축소판이 이 게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인크래프트 외에도, 테라리아(Terraria), 림월드(RimWorld), 로블록스(Roblox), 그리고 시뮬레이션적 측면이 강한 심시티(SimCity)나 최근 론칭한 인조이(INZOI) 등에서도 유저는 일정한 구조 안에서 권위를 대체하는 창조적 주체로서 행동하게 된다.
유저들은 갈등을 해결하고, 자원을 분배하며, 도덕적·물리적 규칙을 정립하거나 해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본질적으로 ‘유저가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권한’을 의미하며, 이는 곧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탈중심적 구조와도 맞닿는다.
그러나 샌드박스 게임이 아나키즘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때때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마인크래프트의 대표적인 무정부 서버인 2b2t는 규칙과 관리자가 없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은 누가 누구를 공격해도 제재가 없고, 배신과 파괴적인, 방해하는 플레이가 일상화되어 있다.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진 ‘파괴의 흔적’은 자유의 또 다른 얼굴을 생생히 드러낸다. 이 현상은 “자유는 곧 책임”이라는 아나키즘 내부의 철학적 딜레마를 다시 떠오르게 한다. 샌드박스 게임은 단순히 규칙이 없는 공간이 아니라,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지속 가능한 공간이다. 즉, 진정한 자유란 단지 억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
흥미롭게도, 많은 샌드박스 게임들은 자율과 통제의 균형을 조율하고 있다. 기획상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제공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암묵적 질서 또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이는 아나키즘이 ‘질서를 거부하는 사상’이 아니라, 권위 없이도 지속 가능한 질서를 상상하는 사상임을 떠올리게 한다.
예컨대 Don’t Starve Together나 Project Zomboid 같은 협력 중심 샌드박스 게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자발적인 협업, 자원 공유, 역할 분담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마치 크로포트킨(Kropotkin)이 말한 “상호부조(mutual aid)”를 게임 내에서 구현하는 과정이다.
즉, 샌드박스 게임은 단순한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아나키즘이 현실화될 수 있는 실험적 플랫폼이 된다.
샌드박스 게임은 자유로운 동시에 불안정한 세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창조자가 되기도 하고, 파괴자가 되기도 하며, 무한한 가능성과 그만큼의 책임을 동시에 짊어진다.
이 샌드박스라는 장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직접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면, 어떤 세계를 만들겠는가?”
“중앙 권위가 사라진 공간에서도, 당신은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가?”
아나키즘이 단순히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통제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실천이라면, 샌드박스 게임은 그 믿음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시험해보는 무대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우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설계하고, 질서를 재발명하고, 자유를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