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아나키즘 ⑥ - 규칙 없는 세계, 가능한가?

진정한 자유는 규칙이 아닌 관계에서 온다.

by 엠알

자유로운 게임을 상상해보자.


목표도, 제한도, 미션도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일도, 해서는 안 될 일도 없다. 누가 당신을 감시하지도 않고, 처벌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런 공간을 보면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이제 진짜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기대감. 하지만 동시에, 그 막막한 공간에서 우리는 종종 멈칫한다.


“무엇을 해야 하지?”


이것이 바로 ‘규칙 없는 세계’라는 이상이 가진 현실적 역설이다. 아나키즘이 추구해온 자유로운 질서는 이론상 매혹적이지만, 게임이라는 시뮬레이션 공간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또 얼마나 쉽게 자유에서 무질서로, 무질서에서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규칙 없는 공간이 주는 혼란


샌드박스 게임이나 일부 오픈월드 게임에서 유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오히려 ‘자유롭게’ 행동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의 크리에이티브 모드는 자원 제한도, 체력도 없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무엇이든 건축할 수 있다. 처음에는 무한한 자유에 감탄하지만, 곧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튜토리얼을 찾고,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건축법을 참고하고, 심지어 누군가 만든 설계도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즉, 규칙이 없는 공간에서도 사람은 결국 규칙을 찾는다. 혹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 아나키즘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권위 없는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발적 합의와 상호 존중, 그리고 ‘내면화된 규칙’이 필요하다.


‘규칙 없음’과 ‘규범 없음’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을 무질서 혹은 반규범적 상태로 오해하지만, 사실 아나키즘은 ‘권위 없는 질서’를 전제한다. 즉, 규칙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누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 간의 협의, 혹은 공동체 내부의 자연스러운 조정에 의해 형성된다.


게임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어, GTA 시리즈의 RP 서버에서는 유저들이 스스로 룰을 정하고, 경찰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적 역할을 유지한다. 게임 자체는 그런 규칙을 강제하지 않지만, 커뮤니티 윤리와 자치 규범이 작동함으로써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이런 사례는 규칙 없는 세계가 단순히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섬세하고 정교한 ‘비공식 질서’ 위에 구축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극한의 자유는 언제 변질되는가?


내 글에서 가장 아나키즘적인 공간으로 자주 언급되는 2b2t 서버(마인크래프트)는 정말로 규칙이 없다. 관리자도 없고, 금지도 없으며, 심지어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살아남는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도배된 욕설, 초보자를 죽이는 베테랑, 지옥처럼 훼손된 지형, 그리고 악의와 파괴를 예술처럼 승화시키는 유저들...2b2t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정말 규칙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원했나?”


“그 자유가 고통과 폭력으로 이어져도 괜찮은가?”


아나키즘은 단순한 해방의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조건으로 한 자유, 즉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나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윤리를 전제로 한다. 게임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유지하고 책임져야 할 구조다.


규칙은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


결국 게임에서 규칙 없는 세계란, 규칙이 ‘전혀 없는 세계’가 아니라, 규칙의 소유권이 유저에게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말은 곧, 개발자의 권위를 넘어서, 유저가 규범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구조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게임들이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 유저가 룰을 정하는 테이블탑 RPG 시스템

- 무한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로블록스

- 유저 간 규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디지털 자치 공동체


이 모든 건 게임 안에서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인간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아나키즘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진짜 자유는 규칙이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


규칙이 없다는 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자유는 규칙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권위 없이도 유지되는 관계와 책임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가능하다. 게임은 우리에게 가상의 무정부 상태를 체험하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내가 이 세계에서 원하는 건 정말로 ‘무제한의 자유’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 질서’인가?”


아나키즘은 이상향일 수도 있고, 디지털 실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게임이라는 세계는 우리에게 그 실험을 안전하게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시뮬레이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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