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O와 커뮤니티 속 아나키즘
유저가 직접 규칙을 만든다면, 게임은 어떻게 될까?
게임은 본래 ‘개발자, 디자이너가 만든 규칙을 따르는 공간’이다. 하지만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 특히 MMORPG나 서버 기반 커뮤니티 게임은 유저들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작은 사회로 진화한다.
아나키즘은 단지 “국가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중앙 권위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믿음은 수많은 MMO 속에서 실제로 실현되고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이브 온라인(EVE Online), 파이널 판타지 14(FF14) 같은 대규모 온라인 게임들은 단지 싸우고 레벨을 올리는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경제 시스템, 정치, 계층, 규범, 언어, 커뮤니티 구조가 존재한다. 이는 현실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디지털 마이크로 사회다.
이 안에서 흥미로운 건, 많은 질서가 게임 시스템이 강제하지 않아도 자생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 길드마다 자체 규칙이 존재한다.
- 거래소에서는 자율적으로 가격 안정화가 이루어진다.
- 특정 던전에서는 암묵적인 매너 룰이 작동한다.
- 심지어 ‘공동의 적’을 만들고 동맹과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유저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감각을 디지털 세계에 적용한다. 그리고 그 결과, 아나키즘적 실험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게 된다.
이브 온라인은 자주 ‘엑셀 위에서 벌어지는 우주 정치 시뮬레이션’이라 불린다. 유저가 수천 명 단위의 세력을 이루고, 자원을 점유하고, 심지어 스파이 활동, 쿠데타, 연합 협상까지 벌이는 진짜 정치의 세계다.
이 게임의 운영사는 최소한의 룰만 제공할 뿐, 그 외의 대부분은 유저의 자율에 맡긴다. 누구든 세력을 조직할 수 있고, 누구든 배신하거나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브 온라인 내에서는 강력한 자율 규범이 작동한다.
전쟁을 치를 땐 조약을 맺고, 동맹 간에는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 목표를 세운다. 또한, 자율적으로 세금이나 징병 규칙도 설정한다. 이브 온라인은 무정부 상태 속 자율 질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게임이라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MMO 게임 외에도 서버 기반 게임 커뮤니티는 더 작은 단위의 아나키즘 실험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GTA RP 서버에서는 각 서버마다 법, 직업, 사회 규범이 존재한다. 디스코드 기반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규칙 설정, 운영진 선출, 커뮤니티 윤리 제정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인크래프트 생존 서버에서는 관리자 없이도 ‘공동체 헌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구조는 중앙 집중형 통제를 거부하고,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자율적 참여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법률 문서를 참고한 것도 아니고, 위에서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우리가 이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질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자치 공동체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재적 운영자가 등장해 서버를 망치기도 하고, 유저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며, 규칙이 없어 혼돈만 남고 붕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핵심은 ‘완벽한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대한 신뢰에 있다.
게임은 이 실험을 반복할 수 있게 해준다. 한 커뮤니티가 무너져도, 다른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규범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순환적 실험은, 현실 사회가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아나키즘적 이상을 탐색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다.
MMO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디지털 공간에서 사람들이 권위 없이도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장이다.
그들은 관리자 없이도 규칙을 만들고, 게임 회사의 개입 없이도 질서를 유지하며,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공동체를 운영한다. 이는 단지 흥미로운 현상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아나키즘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유저는 소비자가 아니라 디지털 시민이고, 그가 만들어내는 공동체는 단지 게임 속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질서의 대안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