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질서를 넘나드는 게임 속 주체의 윤리
게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유저다. 직업을 선택하고, 퀘스트를 수행하고, 던전을 돌고, 때로는 길드를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있는 걸까?
앞선 글들에서 우리는 샌드박스 게임, MMO 커뮤니티, 자치 구조, 탈중심화 디자인 등 다양한 시스템 속 자유를 살펴봤다. 이제 남은 질문은 단 하나다. 그 구조 안에서 유저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정말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는가?
많은 게임은 유저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 직업을 고르게 하고, 다양한 루트를 열어주며, 수많은 스킬트리와 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사실 허락된 자유다.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된 선택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스템을 해석하고, 구조를 거스르거나,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유저가 있다.
- 마인크래프트에서 정부 없이 공동체 규약을 만들어가는 유저
- GTA RP 서버에서 법 없이도 질서를 유지하려는 유저
-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NPC와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유저
- 시스템을 해킹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창의력을 드러내는 유저
이들은 단순히 자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실천하려는 주체다. 아나키스트의 정신이, 디지털 유저의 태도에서 살아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아나키즘이란 항상 시스템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것이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실제 아나키즘은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질서를 만들려는 실천적 윤리다.
게임 속 유저도 마찬가지다. 모든 룰을 깨고 파괴하는 유저가 진정한 자유를 구현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 시스템 안에서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느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적 책임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예컨대, 마인크래프트에서 ‘남 괴롭히지 않기’라는 암묵적 규범을 지키는 유저, MMO에서 공정한 거래와 협동 플레이를 자발적으로 유지하려는 유저, 생존 게임에서 자신의 생존보다 공동체의 지속을 우선하는 유저 등. 이러한 행위는 ‘시스템이 없을 때 나타나는 윤리’, 즉 아나키즘이 말하는 규범 없는 윤리의 형태다.
아나키즘은 단지 “통제를 거부하라”는 구호가 아니다. 그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자유를 실천하라”는 고도의 균형 윤리다. 게임 속 유저가 아나키스트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도 그와 같다.
1. 해석하는 유저
시스템을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구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다시 쓰는 유저
2. 자율적인 유저
보상이 없더라도 자신만의 규칙과 목표를 정하고, 타인의 강요 없이 행동을 설계하는 유저
3. 책임지는 유저
자유의 결과를 타인과 공유하고, 공동체적 상호작용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유저
이런 유저는 아나키스트이자, 동시에 디지털 시민이다.
아나키즘은 결국 질문이다. “왜 이 규칙은 이래야 하지?”, “나는 꼭 이런 방식으로만 살아야 할까?”, “서로가 자율적일 수 있는 방식은 없을까?”
이 질문은 현실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게임 속 세계는 디지털 시대의 축소된 사회 모델이다. 그 안에서 유저는 끊임없이 시스템과 협상하고, 때로는 맞서고, 새로운 구조를 발명한다.
게임이 우리에게 정치적 상상력과 윤리적 실험 공간을 제공한다면, 그 안에서 유저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실험하는 행위자가 된다.
유저는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다. 아니, 어떤 게임 속에서는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누구의 지시도, 시스템의 유도도 없이 자신의 규칙을 만들고, 타인과 공존하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유저.
그 유저는 게임 속 세상에서 통제 없는 자유가 가능한지를 시험하고, 그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디지털 아나키즘의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