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아나키즘 ⑪ - 리니지의 권력과 봉건성

자유를 가장한 사유화의 세계

by 엠알

“성을 차지한 혈맹은 세금을 걷고, 자신의 영토를 지배한다.”


이 문장을 현실 사회가 아닌 게임을 설명하는 데 쓴다는 게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MMORPG의 전설 리니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 실험장이었고, 동시에 자유를 빙자한 가상 봉건 체제의 구현이었다.


자유로운 PvP? 아니다, 권력의 구조다


리니지는 유저 간 전투(PvP), 공성전, 자율적 길드 운영 등 표면적으로는 유저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임처럼 보인다. 누구든 싸울 수 있고, 누구든 연합을 맺을 수 있으며, 게임 내 통치 기구는 ‘유저가 주도’하는 것처럼 설계돼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리니지의 자유는 곧 폭력과 권력의 정당화 장치로 기능한다.


- 혈맹(길드) 시스템은 단순한 커뮤니티가 아니라, 계급과 명령 체계, 통치와 수탈의 구조로 작동한다.

- 성을 점령한 유저 집단은 세금 징수, 사냥터 통제, 아이템 독점을 실행한다.

- 정치는 존재하지만 민주성은 없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 상속되는 권위만이 있다.


이 구조는 아나키즘이 상상했던 자율적 질서가 아니라, 봉건적 사유 권력의 디지털 재현에 가깝다.


유저는 자유로운가, 복속하는가?


리니지에서 개인 유저는 자유롭지 않다. 특정 사냥터를 사용하려면 혈맹의 허락이 필요하고, 시장 질서나 거래 흐름도 ‘지배 혈맹’에 의해 좌우된다. 심지어 ‘현실 돈’이 오가는 구조 속에서 유저는 시스템보다는 다른 유저 집단에 종속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이 자유를 허용했을 때, 유저는 그것을 공동체로 만들 것인가, 권력으로 만들 것인가?”


리니지는 아나키즘적 구조(시스템의 간섭 최소화)를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유저 간의 통제가 강화된 세계였다. 자유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질서로 나아가지 못했고, 강자가 룰을 만드는 현실적 계급 구조로 수렴했다.


리니지는 아나키즘의 반대 실험이다


아나키즘은 중앙 권위가 없는 사회에서도 공동체적 윤리와 질서가 가능하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그러나 리니지는 시스템이 빠진 자리를 일부 권력자가 차지하면서 그 권력을 공유하거나 분산시키지 않고, 사유화했다.


- 공공 자원(사냥터, 거래소, 던전 등)을 통제

- 통제에 저항하는 유저에겐 폭력과 보복

- 내부 충성도는 유지하되, 외부엔 극도로 폐쇄적


이는 자유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게임 안에서 현실 권력을 흉내 내는 봉건 정치의 재현이다. 게임 속 권력이 디지털 공간을 넘어 현실의 위계까지 모사하는 순간, 아나키즘은 사라지고 ‘가상의 리바이어던’만 남는다.


시스템이 빠진 자리, 윤리가 들어왔어야 했다


리니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시스템이 통제하지 않을 때, 반드시 윤리와 공동체 감각이 있어야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무정부가 아니다.


그것은 자율성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협력 시스템이다. 하지만 리니지에서는 윤리 대신 통제, 공존 대신 독점, 자율 대신 복종이 들어섰다.


유저가 시스템의 빈틈을 메운 것이 아니라, 그 빈틈을 지배의 도구로 전환해버린 것이다.


리니지는 디지털 아나키즘의 반면교사다


리니지는 아나키즘을 보여주는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패를 통해 우리는 아나키즘의 조건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단순히 시스템의 간섭이 없다고 자유가 실현되는 게 아니다.

- 자율성과 평등의 문화가 없을 때, 자유는 곧 권력의 도구가 된다.

- 유저 중심 구조는 언제든 디지털 봉건제로 전락할 수 있다.


그렇기에 리니지는 “게임에서 자유는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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