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선택의 무정부 상태
지난 시간 우리는 리니지를 통해 디지털 아나키즘의 반면교사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디지털 아나키즘의 희망(?)으로 볼 수 있는 게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폭격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도시에는 여전히 법도, 질서도, 구조대도 없다. 아이를 안은 시민이 무너진 집을 지나친다. 그는 군인이 아니다. 그저 생존자, 그리고 당신이다."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무너진 체제 속에서 인간이 어떤 윤리를 선택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아나키즘적 상상력의 중심축이 된다.
이 게임의 구조는 단순하다.
- 당신은 2~3명의 생존자를 조작한다.
- 식량, 약, 연료를 모아야 한다.
- 밤마다 다른 장소를 털러 나가야 한다.
- 때로는 다른 생존자 집에 침입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심지어 죽여야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 속에서 당신은 매일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병든 아이가 있는 가족의 집에서 약을 훔칠 것인가? 노인이 혼자 사는 집에서 식량을 강탈할 것인가? 무장을 한 강도 무리와 마주쳤을 때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시스템은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다.
아나키즘은 정부가 없을 때 폭력이 만연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강제된 질서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자율적 윤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그 실험을 극한 상황 속에서 재현한다.
인 게임 속 세계관에는 법이 없다. 심지어 시스템적 제재도 없다. 당신이 약탈을 하든, 살인을 하든, 오직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된다.
하지만 유저는 쉽게 ‘악행’을 선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게임은 당신에게 도덕적 책임을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둑질을 한 생존자는 우울증에 빠지고ㅡ 살인을 저지르면 팀원들이 당신을 불신하며 극단적 선택이나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때 발생하는 감정은 시스템이 부여한 ‘패널티’가 아니다. 그건 유저의 선택이 만들어낸 심리적·윤리적 귀결이다.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의 (설계적)위대함은,도덕을 설정값으로 강요하지 않는 데 있다. 선을 선택하면 보상을 주고, 악을 선택하면 벌을 주는 흔한 도덕 게이지 시스템은 이 게임에 없다.
대신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철저히 아나키즘적인 게임 구조다. 즉, 권위도 없고, 정답도 없으며, 모든 윤리는 유저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유저는 이 게임에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관계 속에서 윤리를 구성한다.
- 아픈 동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 다른 생존자에게 식량을 나누어 준다.
- 자신은 굶더라도 아이에게 음식을 먼저 준다.
이 선택들은 아무런 보상이 없다. 하지만 유저는 여전히 그런 선택을 한다.
왜?
그것이 ‘옳다고 믿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유저는 단순한 생존기계가 아니라 규범이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규범을 만드는 존재, 즉 아나키스트적 주체가 된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유저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도 지켜보지 않을 때, 어떤 윤리를 선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게임 내 선택이 아니라, 권위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누구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깊은 정치적·철학적 물음이다.
아나키즘은 이상적인 세계를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주장한다. “권위가 없을 때, 인간은 여전히 인간다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 말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