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아나키즘 ⑭ - 언더테일: 시스템에 맞서는 윤리

규칙에 저항하는 게임

by 엠알

RPG란 싸우는 것이다. 몬스터를 만나면 무기를 꺼내고, 레벨을 올리고, 보스를 쓰러뜨린다. 정답은 하나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지만 언더테일《Undertale》은 이 오래된 전제를 조용히 거부한다. 전투를 시작해도 칼을 들지 않아도 되고, 모든 적을 쓰러뜨리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보스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이 게임은 유저에게 묻는다.


“반드시 싸워야만 게임이 끝나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곧, 폭력을 중심으로 설계된 시스템에 대한 저항, 즉 아나키즘적 윤리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폭력을 거부할 자유는 ‘선택지’가 아니다


언더테일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유저가 몬스터와 마주했을 때 싸우지 않을 권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공격 대신 대화하기, 웃기, 칭찬하기, 도망치기 등의 행동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평화 루트도 가능하다”는 친절한 옵션이 아니다. 이 게임은 오히려 유저가 폭력을 선택했을 때 더 큰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예컨대, 누군가를 처음으로 죽인 뒤 나타나는 죄책감. NPC들의 표정 변화, 배경음악의 불협화음, 그리고 유저를 향한 메타적 비판. “왜 죽였어?”, “굳이 그럴 필요 없었잖아.”


이러한 장치는 ‘게임 안의 규칙’이 아니라 유저의 도덕 감각과 윤리적 상상력에 직접 호소한다. 즉, 언더테일은 유저가 폭력적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의 무게를 회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게임이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폭력, 유저가 거부하는 질서


RPG의 기본 시스템은 폭력을 전제로 설계된다. ‘싸워서 이긴다’는 전제가 전리품, 성장, 엔딩, 성취감 등 게임의 모든 보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 보상 구조 자체를 뒤집는다.


몬스터를 죽이면 경험치와 돈을 얻지만, 세계는 점점 어두워지고, NPC들은 불안과 슬픔에 잠긴다.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 전투는 오래 걸리고 어렵지만, 세계는 밝고, 우정과 이해가 쌓여간다.


이 구조는 유저로 하여금 시스템의 요구와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긴장하게 만든다. “시스템이 내게 원하는 것과,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이때 유저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존재’가 아니라, 게임의 질서를 해석하고 거부하며, 새로운 윤리를 실천하는 주체로 탈바꿈한다. 바로 그 지점이 아나키즘의 윤리와 만난다.


비폭력은 단지 ‘착한 선택’이 아니다


언더테일의 평화 루트는 흔한 “착한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적 해결 방식이 만연한 게임 구조에서 그 방식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선택이다.


아나키즘은 강제된 질서나 권위를 거부하며, 그 대신 자율성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질서를 상상한다. 언더테일에서 유저가 선택하는 ‘비폭력’은 단지 시스템이 제공한 옵션이 아니라, 그 시스템 자체를 다시 해석하는 행위, 즉 탈권위적 행동의 실천이다.


특히 유저는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세계를 구하거나, 친구가 되거나, 누구도 죽이지 않고 ‘엔딩’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RPG라는 장르 전체를 향한 도발이자, “우리는 왜 항상 싸우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다.


유저는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는가?


언더테일은 유저에게 반복해서 질문한다. 이 질문은 단순한 게임 내 선택이 아니라 게임 외부의 윤리, 나아가 디지털 시대의 주체성을 되묻는 사유다.


아나키스트란, 정해진 질서에 비판적으로 응답하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를 실천하며,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사람이다.


언더테일에서 유저는 바로 그런 주체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이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폭력을 거부하고,

관계 속에서 갈등을 해소하며, 질서를 다시 설계해나가는 유저.


그 유저는 단지 게임을 클리어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윤리로 세계를 다시 쓴 것이다.


“싸우지 않아도 돼.”


그 말은 단순한 옵션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철학이며, 하나의 실험이며, 디지털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유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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