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선택을 통해 보는 탈권위
디스코 엘리시움은 아나키즘을 직접 주제로 삼은 게임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사상이 혼재하고 충돌하는 세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정해진 권위 없이 스스로 정체성을 구성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구조는 아나키즘적 감수성과 깊게 닿아 있다. 이 글은 그 접점 위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이 구현하는 ‘사상의 자유’와 ‘해체된 권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게임은 아무런 목적도 기억도 없이 시작된다. 이름도 모른 채, 속옷 차림의 형사가 벽에 머리를 박고 깨어난다. 그는 누구인가? 유저는 누구인가?
디스코 엘리시움은 유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유저 스스로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해석하며, 어떤 말에 반응할지를 결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게 만든다.
이 출발점 자체가 권위 없는 자기 구성, 즉 아나키즘적 사고가 작동하는 기반이다.
이 게임엔 정답이 없다. 도덕 게이지도 없고, 명확한 선악도 없다. 어떤 선택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유저 자신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핵심 시스템 중 하나인 24가지의 스킬은 유저가 사건과 인물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상적 태도를 ‘내면화’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내면화된 사고는 대사 선택지를 바꾸고,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심지어 세계를 해석하는 언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다.
이처럼 사상이 능동적으로 구성되고, 다시 유저의 감각을 재형성하는 구조는 단순한 철학적 선택을 넘어, 정체성과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는 부서지고 무너진 도시 위에 세워져 있다. 그 어떤 체계도 완전하지 않으며, 경찰조차 구조와 명령이 아닌 혼란과 임기응변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유저는 시스템이 제공한 도덕이나 정답에 의존할 수 없다. 대신, 불확실한 현실을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구조는 곧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규범과 신념을 형성하며, 탈중심적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건 단지 세계관의 해석이 아니라 게임을 읽는 태도 자체가 아나키즘적이라는 뜻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의 사상은 그저 UI에서 클릭해서 고르는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유저가 혼란을 통과하며 획득한 해석의 결과물이다.
즉, 유저는 정답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구성하고 살아내는 자가 된다. 아나키즘의 철학에서 말하는 ‘자율적 주체’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유저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해석을 요구하며, 그 해석에 대한 정서적, 철학적 결과를 함께 체험하게 한다.
아나키즘은 정해진 체제를 해체하고, 스스로 공동체적 윤리를 구성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쓰는 사상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 이념을 ‘이야기’로 보여주지 않고, 플레이로서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디지털 세계 속 아나키스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