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이 시작된다. 마치 던져진듯이
게임은 우리가 선택해서 시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타이틀 화면에서 ‘NEW GAME’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능동적인 개시자가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세계 속으로 늦게 도착하는 존재다. 세계는 이미 설정되어 있고, 공간은 준비되어 있으며, 규칙은 코드화되어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설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세팅된 곳에 갑작스레 떨어진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짐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싶은 장소, 시기, 조건을 고를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세계 안에 있음’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유저는 이 감각을 게임을 통해 실제로 경험한다. 누군가가 만든 세계, 누군가가 배치한 내러티브, 누군가가 설계한 충돌 규칙과 죽음의 조건 속에 아무 설명도 없이 ‘던져진다’.
이 던져짐은 매우 실존적인 감각이다. 우리는 ‘왜 이 게임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고 있지만, 시스템은 그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다. 세계는 열려 있지만, 의미는 부재한다. 선택지는 있을지 몰라도 방향은 없다.
일부 게임은 이를 적극적으로 연출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유저를 낯선 공간에 집어넣는 게임들이 있고, 이들은 유저에게 아무런 목적도 설명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존재하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오직 주변의 움직임, 위협, 반복되는 실패만이 존재한다. 유저는 혼란 속에서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묘사하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우리는 던져진 다음,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존재다.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본질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유저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은 플레이를 통해 뒤늦게 만들어진다.
게임에서 이 감각은 점점 더 구체화된다. 지도 없이 펼쳐진 공간, 반복되는 실패, 아무런 피드백 없이 움직이는 세계는 유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순간, 유저는 실존적 주체로 이동한다.
모든 게임에는 신이 존재한다. 그것은 곧 개발자다.
그들은 세계의 구조를 만들고, 스토리의 배치를 설계하며, 유저의 감정 흐름까지 간접적으로 조율한다. 이 감각은 실존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근본적 조건과 충돌한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허용된 자유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가?
현대 게임은 복잡한 서사 구조와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이 선택들은 사실상 설정된 자유일 때가 많다. 당신은 3개의 선택지를 마주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스템 바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철학자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e)의 한 형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유저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시스템은 자유를 흉내 낼 뿐이다.
이 구조에서 유저는 신이 될 수 없다. 그는 해석자이자, 적응자이며, 동시에 혼란에 빠진 주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는 움직인다. 이유를 알 수 없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죽더라도 다시 시작한다.
그 반복 속에서 생기는 무의식적 물음들 — “왜 나는 이걸 하고 있는가?”, “왜 죽어도 계속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이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게임에서 실패는 일상이다. 우리는 죽고, 리셋되고, 또 죽는다. 다크소울이나 하데스처럼 반복이 전제된 게임에서는(물론 일반적인 RPG가 다 그렇지만), 플레이어의 본질이 ‘계속 살아남으려는 자’라기보다는 ‘죽음을 견디는 자’로 자리 잡는다. 게임오버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적 세계관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카뮈는 인간 존재를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했다. 그는 산 위로 돌을 밀어 올리지만, 돌은 다시 굴러 내려온다. 의미 없는 반복. 그러나 카뮈는 그 속에서 비극을 긍정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는 무의미한 세계를 받아들이고도 계속 행동하기 때문이다.
유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죽어도 다시 리스폰하고, 좌절해도 다시 도전한다.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목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유저는 그 목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플레이를 지속한다. 이 반복 속에서 유저는 묻는다. “이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이 실패는 의미 있는가?”, “이 고통은 나를 구성하는가?” 이 질문은 결국 자기 존재의 감각을 구성하게 만든다.
실존주의는 삶이 고통스럽고 불확실하며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유저는 게임 속에서 이 철학을 단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으로 경험한다. 아무 의미도 설명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그것은 정해진 답이 없더라도 살아있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게임은 유저에게 끝내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퀘스트의 목표는 있을 수 있지만, 그 퀘스트가 왜 중요한지는 유저가 판단해야 한다. 예컨데 한 게임에서 우주는 끝없이 순환하며 붕괴되고, 유저는 그 안에서 조각난 정보를 하나하나 모아 스스로 이야기의 구조를 구성해야 한다. 이 게임은 미션을 주지 않는다. 오직 우주와 죽음과 시간만이 있다. 이 모든 조각을 연결해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오롯이 유저의 몫이다.
이 감각은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적 주체의 해석적 존재방식과 연결된다. 우리는 단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게임이 주는 무수한 정보와 모호한 기호들 속에서, 유저는 자신만의 길을, 의미를, 목표를 만들어나간다.
그러므로 ‘던져짐’은 수동적인 비극이 아니라, 실존의 시작이다. 목적도 없고 설명도 없으며, 설계된 세계 속에 낯선 존재로 내던져졌더라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 세계를 거부하거나, 해석하거나, 새롭게 구성하는 것. 유저는 처음엔 도착자였지만, 끝에 가서는 창조자가 된다. 이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가능성이고, 게임 속에서 실현되는 철학적 진실이다.
게임은 시스템이다. 논리, 규칙, 연산, 리소스 배분의 결정체다. 그러나 게임은 동시에 의미 없는 시스템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것을 살아있는 공간, 사유의 장, 실존의 연습실로 바꾸는 건 유저다. 시스템이 의미를 주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의미를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실존주의의 가장 강력한 선언이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떨어졌고, 목적 없는 조건에 내던져졌으며, 설명 없는 규칙에 순응해야 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우리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선택을 감행했으며, 때로 실패하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이 행위 그 자체가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