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이 넘은 주택들이 즐비하고, 비어있거나 낡은 집이 주변에 몰려 있다. 더욱이 기찻길 옆이라 소리에 휘어 잡히는 때가 자주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약간은 시야에 가린 오랜 시멘트 기와가 내려앉은, 벽에 금이 가 지팡이를 쥐어 줘야 하는 집이다.
덕분에 동네의 일부분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것이 또한 나의 해방감이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몇 걸음 걸으면 눈여겨보아야 보아지는 집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과 살지 않는 집의 비율이 반반인 곳에서 동네 책방을 할 생각을 한 것은. 그런 곳에서 누군가의 불빛이 되기로 했다는 것은. 점점 더 많아질 빈집과 그로 인한 도시의 황폐화에 맞선 일생 최대의 도전일 법하지만, 실상은 그리 꿈이 크지 않다.
충청남도 부여→충청남도 금산→충청북도 옥천. 시골집을 구매하려고 봐왔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논산에 집을 샀는데, 왜 샀냐고 하냐면 글쎄요. 동네 책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한 곳 같아서라고 할까요?
내가 사는 동네엔 어느 곳 하나 이쁜 곳이 없다. 거기에 해월가를 둘러싼 폐가들. 그래서 이 집을 샀다. 유동 인구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동인구가 없는 곳이어서 좋았다. 유일하게 불을 밝힌 상점으로 이곳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따뜻했다.
너무 시골이 아닌, 그렇다고 집에서 너무 멀지도 않은.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사도집인 것도, 기찻길 바로 옆인 것도, 사람들이 일부러 찾지 않으면 오지 않을 곳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가 되고 일단 지르고 보자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곳이 책방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 아닐까? 싼 곳을 임대하거나 입지가 좋은 곳에 대형서점을 내는 쪽 모두에서 빗겨 났다. 그렇게 입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곳에 떡하니 20년도 넘게 아무도 살지 않은 폐가를 사서 책방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는 평일 한낮에도, 주말에도 조용하다. 거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와서 간간히 이야기하시고, 걷다가 쉴 수 있는 의자가 곳곳에 있다. 처음에는 지켜만 보던 분들이 하나둘 다가와서 말을 거신다. 책방을 할 거란 말에 “여기 학생들이 책을 사러 오려나?” 하고 걱정하신다.
처음엔 해월가로 가는 길이 익숙치 않아 가기에 바빴는데, 여러 차례 가다 보니 점차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을 가는 동안 아름다워질 것 같다. 초록 이파리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미는 때에 집을 샀고, 일찍 찾아온 장마로 흠뻑 젖은 세상은 무성한 푸른 잎들로 번져갔다.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손가락들이 인사를 하려나. 그 속으로 나부끼는 노란 잎들이 얼굴을 내밀려나. 나는 계획에도 없던 풍경의 인사까지받는다. 이게 행복인가.
살면서 작은 책방에서 동네 주민들이 느끼는 편안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 전혀 책방이라고는 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곳에 꼭 책방을 차리리라 생각했는데 꼭 맞는 곳이다. 책방은 시작부터 끝까지 운영난에 시달릴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전선. 이 세상의 책들은 살자고 태어나 죽음에 가까워진다. 그런 책들을 품에 안고 있는 작디작은 책방이, 나만의 서재가 생기길 꿈꿔본다.
늦은 저녁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서 하늘을 보는데, 더 이상 무섭지가 않다. 이 광경 속에 있는 내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마치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그나저나책방을 차릴 수는 있을까?에서 아무튼, 지금은 아무렴 어때?로 넘어와 있는 상태다. 혜안이 없으면 어떻고, 냉철하지 않으면 어떻고. 이득이 없으면 어떤가. 좋으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