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Oct 26. 2022

미국 시댁의 연락 문제

피해갈 수 없는 단톡방의 굴레


한국 사회에서는 관계가 전부이다. 포지션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지정된다. 태어나자마자 부터 생긴 나의 위치가 그 관계에서의 역할을 정의한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행동반경, 생각과 감정의 허용치와 의무감까지. 첫 딸은 집안 살림 밑천이다? 삼대독자는 벼슬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그래서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장녀가 되어야 하고, 며느리가 되고, 막내 직원이 되고, 후배가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어려운 관계 시댁. 며느리로 입성하여 시부모님과 시누이를 영접하고, 동서지간에 동네 사람에 양쪽 부모님 형제자매, 사돈에 팔촌까지 신경 쓰이는 관계이다.


우리가 나고 자라면서 이런 관계에 쉽게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제까지 그래 왔기 때문. 희생이든 착취든 감정노동이든, 그냥 다들 그런다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하면 그걸 문제 삼는 내가 유난히 되니까.




내가 만약 한국인 시어머니를 만났다면 나도 그러려니 하며 그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한국식으로 며느라기를 자처했다. 시어머니께 전화나 문자가 오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공손하게 받고 먼저 끊으실 때까지 기다렸다.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에 남편을 닦달하며 부부싸움을 했다.


네가 중간 역할을 잘해야 우리 모두가 평화로울 거라고. 알아서 제대로 하라고. 나는 네가 그런 말 안 듣게 내가 다 막아주는데 너는 뭐 하는 거냐며. 똑같이 당해봐야 알겠냐고.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락도 안 드리고 시댁도 가지 않았다. 생신도 명절도 각종 무슨 무슨 날도 전부 건너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받은 문자. 나의 노파심이 무색하게도 평화로웠던 문자였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항상 나의 기대(?)를 뛰어넘으신다. 작은 우물 안 개구리에게, 천장이 막혀있다고 믿고 뛰어나가지 못했던 벼룩에게, 나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다.




"너는 손이 없니 발이 없니,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먼저 전화하고 주말마다 와라."

"며느리가 돼서 네가 하는 게 뭐가 있니? 네가 그러고도 자식이니?"


그러니까 이런 거친 말도 모두 마음만은 사랑이겠지.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도 신경을 써 줬으면 하는 복합적인 표현이겠지.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 너도 건강해라."

"여기는 이런저런 재밌는 일이 있었다. 너도 함께였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네 소식을 들을 때마다 행복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문제라고 걱정했던 일들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때. 그때 오히려 된통 혼나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나에게 재촉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준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시어머님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시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시간을 갖고 거리를 두니, 당신들의 진심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많은 순간,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또는 사랑하는 배우자의 가족이, 왜 꼭 강제가 돼야 하는 걸까?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은, 진심이 생략되고 형식만 남은 건 아닐까? 결혼식, 장례식, 제사, 명절, 김장 ... 의무가 의미를 앞서갈 때 진심보다 금액이 먼저일 때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하는 걸까?


부모님은 옛날 사람이라 안 바뀐다지만, 요즘 사람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https://brunch.co.kr/magazine/kim30064789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이전 08화 미국 시댁의 개인 플레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