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 알면 된다.
'인연'
사람을 만나면 쉽게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거나 웃는 모습이 맘에 들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 번 만난 인연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며 꼭 다음에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헤어졌다.
한 번 맺은 인연과 이별이라도 하면 대성통곡을 하며 아쉬워했고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 맘을 혼신을 다해 표현했었다.
이렇듯 점점 사람과의 인연을 바라보는 나의 자세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진지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달랐다. 유년시절엔 그 만남이 단짝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어른이 되고나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왠지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대다수였다.
처음 만나 이런저런 애기를 하며 친구로서 또는 동료로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그랬냐'는 듯 태도가 다른 이들을 자주 만났다.
어느덧 나 스스로도 점점 사람에 대한 벽이 생겼다. 사람을 만나도 나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눈앞에 마련된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해 즐겼다. 하지만 그 담날엔 아무일 없던듯이 굴었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확실하게 그러라 배웠다. 예를 들어 술을 진탕먹고 그날 '개'가 되더라도 그 다음날 절대 전날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 배웠다. 좋게말해선 너의 '개'같은 행동을 잊었으니 민망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의 제스처며 나쁘게 말해서는 '그날 그렇게 분위기가 좋고 너와내가 한 몸같이 한뜻을 이뤘음에도 그날의 우리는 잊어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마음이 잘맞는 사람끼리는 모임이 형성됐고 꾸준한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럭키'다.
업무적이든 개인적인 만남이든 2년~5년 이상의 만남을 이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락하며 얼굴을 마주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어린시절에 쌓은 우정은 그래도 그나마 오래도록 내 곁을 지키고 있음에 감사하다. 하지만 이또한 점점 흐릿해져가는 기분이 든다. 반면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곁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사람과의 인연에 큰 기대를 갖지 않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깊은 인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서로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자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사정에 의해 그리고 현실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게 사람 인연이란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남들은 이미 그랬을) 인연의 무게를 스스로 덜어내기 시작했다. 헤어짐에 너무 아쉬워 하지 않았고 만남에 너무 들뜨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삶의 시간 속에서 그때 그 시절 만나는 인연에 충실하게 살아가기로 했다.
2017년 작 유보라 작가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드라마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마담과 그 술집을 즐겨 찾는 건설사 이사가 철새를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건설사 이사는 철새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논다.
▷건설사 이사 "저기 갈색인 새 보이지? 재들은 러시아에서 왕복 3660km를 쉬지도 않고 오거든 여기서 딱 2주반에 하바롭스크까지 가 말이되냐 어? 참 네가 저게 얼마나 빠른건지 감이 안오는 모양인데 얼마나 빠르냐면"
▷마담 "설명그만해요. 다 알면 재미없잖아. 저렇게 있다. 또 미련 없이 떠나겠지. 그것만 알면 되요"
'저렇게 있다 또 미련 없이 떠나겠지'라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뒤돌아보니 딱 이런 기분이다. '미련없이 떠나다'
나는 왜 안되는 인연을 붙잡고 힘들어했을까. 그리고 사소한 인연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특별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다 잠깐 '나'라는 정착지에 정차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 힘쓰지 말걸. 그냥 잠깐 쉬어가라며 편하게 해줄걸
우리의 모든 인연은 '주차'가 아닌 '정차'다. 영원한 것은 없고 잠깐 쉬었다가는 그런 만남이다. 그 만남속에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게 내가 할일이겠지.
*인연에 너무 깊이 빠지지말고, 맑은 샘물에 발 담그며 발장구를 치듯 즐거운 일을 만들자. 몸이 추워지면 그 샘물에서 발을 빼듯, 그렇게 쉽게 인연을 생각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