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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가던 추억

제4장  (가족소설 : 팔색 무지개 피던 집 )

 계룡산 주봉,  뾰족한 괴암능선의 실루엣이  멀리서 드리워지는 용머리 마을, 그 중심부에 상훌의 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같은 편리해진 길과 자가차량이라면  한 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이다.


그러나 반세기 이전에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하루는 족히 걸리는 만만치 않은 외갓집 방문길이었다.


 반면에  상훌이는  외가에 가는 날만큼은 최고의 즐거운 나들이 길이 되었다.

 시골아이들이 그랬듯이 집과 동네를 벗어나기 힘들던 때에 멀게만 느껴지던 외갓집에 가는 날은 상훌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상홀이 학교 가기 몇 해 전인가 외조부의 회갑연에 참석할 때였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하여

집을 나섰다. 부모님, 형, 누님들과 함께 줄지어 산길을 넘고 돌아

십리밖 합곡버스정류장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잠시 후 뿌연 먼지 흩날리며 다가오는 시골버스가 멈추면 높다란 출입문 차량계단을 형님 누님손에 이끌려  가까스로 올라타야만 했다.

버스는 덜컹덜컹 읍내를 향해가고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외가가 있는 계룡산방향으로 향해 갔다.


어느샌가 그쪽의 하마루정류장에 도착하여 상기된 마음으로 버스계단을 내렸다.

아직도  외가까지는 십리길 조금 못 미치는 들판길을 또 걸어가야만 했다.


드디어 크고 우람한  당산나무가 반기는 용머리 마을 외갓집에  오후 늦게 도착했다.

동네가운데 널따란 마당을 가진 외가는 벌써 누런 광목 차양막이 쳐있고  잔치 전날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상훌의 외조부는 어린 시절 유복한  일가집에 양아들로 보내졌단다.  그 덕분에 어렵던 옛 시절에  외조부는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상훌의 외갓집도 형편이 괜찮았으니 동네 한가운데에 큰집을 짓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저녁에는 기관에서 근무하던 외삼촌친구들의 대형 탑승트럭이 도착했고  외갓집 마당은 사람들로 밤새 번잡했다.  


또한 저녁 늦게 상훌 부친의 손님들도 그의 장인어른 회갑연을  축하하고자  상훌의 고향에서 속속 도착했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 백 리 길이 넘는 상훌의 외가에 자비를 들여 찾은 고향의 어른들이 상훌은 남다르게 생각됐다.  물론 상훌의  부친 쪽에서 모종의 언질이 있었다고 하여도 그러했다.


재너머 이 층집 아재도 참석하였고

큰 동네 어르신들 여러분이 상훌의 외가를 찾아왔다.  

그들은 회갑연이 끝나고  풍광 좋은 계룡산과 그 아래 신원사 사찰까지 들렀다는 것을 상훌은  후일에 알게 되었다.


이는 분명히 상훌부친의 처가동네와 계룡산에 대한 파란만장했던 소싯적 체험과  입담 등이 통했을 것이다.


상훌 부친은 어릴 적 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계모슬하에서  유년기를 맞는다.


그는 청소년 시절쯤에 힘겨운 계모슬하에서 벗어나 백여리밖 공주계룡산 아래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근면 성실함 때문에 그곳에서 수양부모님을 만났다.

그리고 이웃동네 어른이던 상훌네 외조부의 눈에 들어 

결국은 상훌이 모친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단다.


상훌이가 들은 바에 의하면  한 번은 그 동네에서 혼사가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동네의 여러 청년들 중에서 폐백예물과 이바지 음식을 등짐에 지고 신랑과 함께 신부집에 다녀올 것을 성실한 상훌의 부친께 제안했다고 한다.


그 제안에 그는 일언반구 없이 

거절하였는데 이를 지켜봤던 상훌 외조부가 의아해하면서 물어본 즉 양반가문 사람은 그러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그 당시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상훌의 외조부는 그전에도 종갓집 자손이란 말은 들은 바 있지만 

확신을 못하던 중이었다.


그러뎐 중  이러한 양반가문 자손의 소신 있는 처신을 목격하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훌네는 공주 계룡산아래 용머리 마을에 외가를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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