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빼이 May 23. 2024

초빼이의 노포일기[서울 중구 을지로 명동서서갈비]

소갈비와 폭탄주가 난무하는 민간인들의 비공식 UN 총회장

'서서 먹는'는 집들은 언젠가부터 우리 음식계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형국이다.

특히 '식사'의 장르보다는 '음주'의 장르에서 더 익숙한 '서서 먹는' 형태는 8~9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라고는 길거리 분식 포장마차(떡볶이나 어묵을 판매하는)나 전통시장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을 지경이다. 우리의 음식사에서 '서서 먹는' 방식은 꽤 흥미로운 형태의 식당 문화였으나 점점 그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서 '서서 마시는 술집'의 시작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우리식 고유의 표현으로 '손님이 서서 마시는 술집'은 '선술집'이라 부른다. '서다'라는 말과 '술집'이라는 말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말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손꼽히던 혜원(蕙園) 신윤복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혜원전신첩]에는 '주사거배(酒肆擧杯)'라는 그림에서 선술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모가 술동이를 옆에 두고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 옆에서 국을 뜨는 장면인데 술을 마시러 온 손님 5명이 모두 서 있다. 5명의 손님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있고 그중 한 명은 안주(음식)를 집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다. 그림으로 확인이 가능한 조선시대 선술집의 옛 모습이다. 이런 선술집의 형태는 큰 외형적 변화 없이 20세기까지 비슷한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선술집'이 유행했던 시기는 1920년대에서 30년대 사이, 그리고 1960년대 경. 술 한 잔 값을 내면 기본 안주를 무료로 내주던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초빼이처럼 주머니가 가벼운 많은 술꾼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선술집은 서민의 술집, 가난한 자들의 사랑방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선술집은 비교적 싼 가격에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경기가 좋지 않거나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유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20~30년대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우리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시기였고, 1960년대는 전쟁 직후 사회적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 자연스레 물자와 일자리가 부족했던 시기였다.


옆나라 일본도 이러한 '선술집(입식주점)'의 전통이 오래된 곳이다. 오늘날 간사이 지방(오사카 등)을 방문하면 꼭 한 번은 들려봐야 한다는 대표적 관광상품 격인 '다치노미(たちのみ, 立ち飲み 또는 立ち呑み)나 카쿠우치(角打ち)'가 바로 일본식 선술집의 전형이다. 이런 일본식 선술집은 1990년대 후반 일본 경제가 버블 현상으로 인해 극심한 침체기를 맞기 시작하자 다시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점은 우리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24년 잡지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는 당시 선술집의 묘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되어 있다. '막걸리 곱빼기' 한 잔에 5전을 받고 추어탕부터 너비아니, 제육, 북어, 빈대떡, 산적 등 다양한 안주를 술 한 잔 주문 할 때마다 먹을 수 있었다. 술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제공되는 안주가 달라진 것. 막걸리 한 잔에 곁들일 수 있는 안주를 내었으니 덜어먹기 쉬운 음식들이 제공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1930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음식 가격에 대해 알 수 있는데, '설렁탕이 10전, 장국밥, 어복장국, 대구탕반, 비빈밥, 만두, 냉면 등이 15전'*이라고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설렁탕 한 그릇 먹을 가격이면 술 두 잔에 안주로 나오는 국밥과 고기를 안주로 먹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음주와 포만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선술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야말로 술 좋아하는 초빼이들은 두 손들어 환영할만한 시스템이지 않은가?


초빼이들의 행복은 여기까지. 술을 마시면 안주를 무료로 내주는 선술집의 영업 형태는 오래된 관행이었지만 이런 관행에 공권력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918년 술 한 잔 값을 4전으로 하고 안주를 따로 팔게 정책적으로 강제했었고, 1936년에도 그러한 시도가 한 번 더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영업집의 술과 안주 가격을 공권력이 제한하려 했던 시도이다. 요즘 시대라면 소송에 걸리기 좋은 대표적인 공공기관의 갑질이자 위법적인 행위이나 그 시대엔 이런 행위들이 충분히 가능했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이런 선술집은 7~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영업장의 이윤추구 강화와 '주세법' 등으로 인해 '잔술 판매 금지'되자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포장마차나 다른 형태의 영업장에서는 여전히 이런 선술집의 영업 형태가 암암리에 남아 있었고 마산의 통술집이나 통영의 다찌, 진주의 실비집 그리고 전주의 막걸리 집의 영업형태는 옛 선술집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위스키 바나 하이볼을 판매하는 집들도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잔술을 파는 집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여전히 불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빠르면 24년 5~6월부터 법 개정을 통해 잔술 판매가 허용된다고 한다) 


옛 선술집의 영업형태를 따르는 집들은 아직도 조금씩 남아있지만 '서서 마시는' 진정한 의미의 '선술집'을 찾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초빼이의 나이상 선술집을 찾았을 리 없고, 하다못해 포장마차의 '소주 잔술'도 경험하기에도 부족한 나이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경험해 본 잔술은 등산로 입구나 나지막한 산 중턱에서 몰래 막걸리 한 잔씩 팔던 곳과 황학동 시장에서 팔던 1천 원짜리 막걸리 한 잔을 마셔본 기억이 전부이다.      


지난주 서울에서의 약속은 다행히 초빼이가 장소를 정할 수 있어서 그동안 점찍어 뒀던 곳으로 낙점하였다. 아무래도 고깃집이기도 하거니와 '서서 먹는' 선술집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기에 더더욱 혼자 방문하기가 꺼려져 계속 방문을 미루고 있었던 곳. 게다가 얼마 전 마포지역 개발로 인해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 연희동과 명동입구 두 곳으로 분리되었다. 연희동으로 옮긴 곳은 원래 가게의 간판을 취했고, 명동점은 원 가게의 문을 떼 오며 원 가게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연희동보다 명동입구 쪽이 접근성이 좋아 명동입구의 매장으로 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야말로 인간의 잃어버린 '거친 야성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도 '힙'한 '플렉스'가 충만한 곳이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근처의 명동서서갈비가 오늘 소개할 곳이다.


공휴일 낮 시간에 찾은 이 매장은 가게가 자리 잡은 골목 입구에서부터 고기 냄새가 진동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화점과 특급 호텔이 즐비한 곳, 길 건너편에 이런 허름하면서 야성이 넘치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이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매우 낯설었지만 또 그 자리는 그 가게를 위한 자리인 것 같아 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근사한 차림의 젊은 친구들이 이미 매장 안에서 낮술을 즐기고 있었는데 굉장히 잘 어울려 보였다. 이미 이른 시간부터 공휴일의 낮 시간을 즐기려는 젊은 초빼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3시 정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사람들이 덜 찾아 웨이팅은 피할 수 있었다. 이미 도착한 일행들이 한쪽 벽에 붙은 드럼통을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었다. 단일 메뉴만 판매하는 집이라 종업원분께 '몇 인분'인지만 이야기하면 주문은 완료. 도라무깡(드럼통)으로 만든, 정감 넘치는 테이블에 올라온 찬은 의외로 간단하다. 개인용으로 내주는 소스 하나와 불판에 올려 끓인 후 찍어 먹는 소스 하나, 편마늘 한 종지, 맵지 않은 고추와 된장이 전부이다. 김치와 밥은 별도로 판매한다.

육우의 갈비뼈에 수입산 안창살을 덧붙여 만든 소갈비와 불필요한 찬을 줄여 고정비용을 낮추어 소갈비를 비교적 싼 가격에 내주는 구조이다. 옛 실비집(선술집의 한 형태인)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운영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런 효율성과 실리적인 운영의 기원은 이 집의 이전 상호를 찾아봐도 알 수 있다. 1950년대에 첫 영업을 시작하면서 '김포집'으로 시작, 후에 '실비집', '연남식당', '연남서식당'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최근에는 '명동서서갈비'라는 상호를 사용한다. 실비집을 운영해 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이런 형태의 고깃집 설계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안창살'부위는 소의 갈빗살과 참갈비 사이, 그리고 시중에서 갈비라 칭하며 많이 유통되는 마구리살 바로 위쪽에 붙은 살이니 넓은 의미에서 갈빗살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게다가 안창살의 사전적 정의도 갈비 안쪽의 가슴뼈 끝에서 허리뼈까지 가로지르는 근육인 횡격막을 분리해 정형한 것이라 하니 소의 갈비 부위 가운데 하나가 맞다. 요즘처럼 정육 기술이 발달한 시기에는 각 부분을 세분화하여 상품성을 높여 판매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정형(정육)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갈비 부위로 팔리던 부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찾았던 시간은 손님이 적었던 편이라 직원분께서 일일이 고기를 구워주셨다. 잘 달궈진 무쇠불판에 고기를 얹으니 바깥의 빗소리를 그대로 가져다 테이블 위에 옮겨놓은 듯하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는 맛있게 양념된 소갈비의 달콤함이 숨겨져 있다. 보통의 고기를 구울 때 맡을 수 있는 불향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 한 움큼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 연기 속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세상 어떤 향수가 이런 기분 좋은 향을 낼까?


불판에 올려진 고기가 조금씩 안색을 바꿔간다. "소고기니 겉만 익으면 드셔도 돼요"라는 직원의 말에 넋 놓고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 모두가 약속을 한 듯 젓가락을 집어 든다. 한 점씩 집어든 소갈비 조각엔 각자의 기대감도 한 움큼 같이 올려져 있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입을 헹군다. 이런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먹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도 중요한 법. 알코올로 깨끗하게 소독한 입으로 소갈비 한 조각을 밀어 넣었다. 우선 달콤하다. 그런데 그 달콤함이 과하지 않다. 마치 옛날식 갈빗집에서 양념갈비를 먹는 듯한 느낌. 아주 어릴 적 부모님과 찾았던 고깃집의 그 추억을 자연스레 소환한다. 한숨 죽인 밋밋한 간장과 설탕, 후추 몇 수저, 참깨 그리고 참기름이면 충분히 낼 수 있는 맛이다.  

"아! X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마치 감탄사처럼 튀어나온 두 글자 단어에 모두들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들 그 반응을 수긍한다는 의미일 게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본능적으로 내뱉은 단어에 일행들도 대리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에 오염된(?) 입을 다시 소주로 헹궈낸다.


명동 서서갈비에서 제공하는 소스는 총 두 가지이다. 참기름, 간장, 채 썬 파와 깨 등으로 맛을 낸 소스와 동일한 소스에 편마늘을 잔뜩 썰어 넣은 소스이다. 마늘을 썰어 넣은 소스는 불판 위에 올려 끓인 후 찍어 먹는다. 초빼이는 개인적으로 끓여서 먹는 소스가 더 입에 맞았다. 좀 더 풍족하고 정갈한 맛을 느낄 수 있어 초빼이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단 이 소스의 맛을 보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불판 위에 올려두고 조금 기다려야 팔팔 끓어오른다. 고향과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자리라 옛날 진영읍(현재의 김해시 장유동)에 유명했던 '진영 갈비'집 거리에 대한 추억까지 끄집어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고기를 먹다 문득 따끈한 흰쌀밥에 고기 한 점을 올려 먹고 싶어졌다. 얼른 주방 앞으로 뛰어가 즉석밥을 들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원래 고기와 밥을 서로 섞지 않는 편인데, 작년과 올 초 오사카의 야키니쿠 집 취재를 위해 출장을 갔다가 잘 구운 좋은 고기를 흰 밥에 올려 먹는 맛을 알게 되며 생긴 버릇이다. 따끈한 밥과 소갈비를 한 번에 집어 입속에 넣으면 양념 소갈비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뜨거운 밥이 증폭제 역할을 하며 고기의 향과 맛을 삼십일만 배 정도 증폭시켜 준다. 오랜만에 느끼는 제대로 된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하모니. 안타깝지만 어지간한 식당의 오래된 공깃밥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햇반이 더 나을 경우가 많다. 도저히 소주를 멈출 수 없다. 쓴 소주와 달콤한 소갈비, 그리고 흰쌀밥이 어우러져 내뿜는 아우라는 두 시간을 전철에서 시달리며 상경한 '낙도 거주자'의 피로감을 이렇게 훑어낸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던 때늦은 봄비가 조금 누그러지자 어느새 손님으로 가게가 가득 차 버렸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일본어와 영어 소리에 주위를 둘러본다. 낯선 인사말과 단어들이 드럼통 위로 오가기 시작한다. 마치 십몇 년 전 공연을 위해 찾았던 맨해튼 이스트 강변의 UN본부 총회장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다. 늙은 아재들만 찾을 것 같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명동 한 구석의 선술집이지만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즐겁게 한국식 소갈비 구이를 구우며 소주 한 잔 걸치는 곳이 되었다. 명동 서서갈비는 어느새 외교관들이 아닌 민간인들이 만든 '비공식 UN 총회장'이 되어 버렸다.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의 정취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등한 대접을 받는 곳, 상임 이사국 따위의 어쭙잖은 특권은 발 붙일 수도 없는 곳이다. 


다양한 눈동자 색을 가진 사람들의 옷으로 자연스레 파고든 고기 굽는 냄새는 한국의 독특한 기억으로 치환되어 가슴에 담길 것이다. 핵폭탄이 아닌, 소주와 맥주로 만든 '소폭' 폭탄주 한 잔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이 날의 기억을 추억으로 빚어낼 것이다. 평화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더 이상 취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일행들과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분위기에 취하고 양념 소갈비의 위대한 맛과 향에 취하는 시간이었다. 주말, 시간을 내서 마누라님과 함께 찾고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의 전통 선술집에서 이제는 다양한 인종들이 즐기는 다국적 술집이 되어버린 이곳을 알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앞선다.


* 동아일보, 1930년 11월 12일, 3면, "시내 명음식점 요리도 감하(市內 名飮食店 料理도 減下)'

** 박현수, 경성의 선술집, (서울과 역사 제106호, 서울역사편찬원), 2020년 10월 31일, P.113~114, 요약 및 발췌


[메뉴추천]

1. 2인 이상 방문 시 : 소갈비 + 소주 + 햇반 및 팩김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을지로나 명동 일대의 민영 주차장에 주차시 현금 지원(1시간 주차료 5천원) 한다.

2. 월~일 11:00~22:00 

3. 참고 

    - 콜키지 무료. 단 명동서서갈비에서 판매하는 소주와 맥주는 제외. 그 외의 술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 반드시 끓이는 소스의 맛을 봐야 한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하동관, 미성옥, 행화촌, 산동교자, 할머니집, 인천집, 대원집, 용금옥, 부민옥, 북어국집, 남포

      면옥, 참숯골, 오륙도, 도리방, 청송옥, 송옥, 현대칼국수, 초류향, 이북만두, 낙동강, 을밀대, 도리방 등

    - 2차는 인근 무교동과 다동의 노포들을 추천한다.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노포의 천국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빼이의 노포일기[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연중반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