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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Sep 26. 2024

이런 해장라면이라면, "죽어도 좋아"

130.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훼드라

음식은 추억이다.

음식맛에 대한 기억은 10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음식과 음식점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수 십 년을 넘게 이어간다. 초빼이가 마산의 반달집이나 부산의 마라톤집을 수십 년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처럼 삶의 어느 특별한 순간 맛보았던 음식이나 자주 찾았던 노포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깊게 마음속에 각인된다. 


이러한 노포들은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에도 자주 등장했다. 

1972년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일본의 다나카 수상은 만찬에서 중국의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 총리와의 만찬 자리에서 "류삐쥐(육필거, 六必居)는 잘 있나요?"라고 물으며 자신이 젊은 시절 자주 찾았던 베이징의 채소절임 노포를 물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1973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조절위 제3차 회의'에서 북한 대표단 박성철 부주석은 “용금옥은 아직 잘 있습니까?”라는 첫마디로 얼어붙었던 회담장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 서로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노포에 대한 '공통된 기억'은 이처럼 첨예한 대립이 일상과 같던 냉전 시기에도 잠시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었다.  


연대생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오래된 노포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곳이나 되었다.(초빼이의 세대에는 그랬다. 지금 세대들에게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삐삐나 전화가 없던 90년대 초반까지 신촌에서 약속장소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홍익서점'과 연세대학교의 상징인 독수리를 그대로 상호로 사용해 연세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던 '독수리 다방(일명 독다방)', 그리고 운동권 학생들의 대표적 아지트였던 학사주점 '훼드라'가 바로 그곳이었다. 


초빼이의 발걸음은 신촌 로터리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에 예정된 인터넷 매거진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김에 신촌 로터리의 훼드라를 찾아 취재하고 싶었다. 비록 연대생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해장라면과 계란말이에 막걸리와 소주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 나름 먼지 한 톨 정도 크기의 인연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훼드라가 처음 문을 열었던 것은 1969년 즈음이다. 처음엔 관심을 받지 못해 3년 사이에 4명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당시 신촌로터리의 현대백화점 자리에는 신촌시장이 있었는데 연세대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0년 돌아가신 1대 故 조현숙 사장님이 1973년 인수 후 77년부터 학사 주점의 형태로 운영하며 비로소 신촌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부터는 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로 유명해졌고 특히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인 이한열 열사의 단골집으로 알려지며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후 당선사례는 훼드라에서 하는 전통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려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니 품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이 집은 상호에서조차 그 연륜이 묻어 나온다. '훼드라'라는 상호는 1962년 개봉된 미국 영화 '페드라(Phaedra)'에서 제목을 차용한 것. 그리스 신화 속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페드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함께 각종 문학, 희극,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페드라 콤플렉스(Phaedra Complex)'를 다루었던 영화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그 영화의 원제를 7~80년대식 옛날 영어발음으로 옮겨 적었다.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 이면엔 어쩌면 '(민주화를 이룬다면) 죽어도 좋아'라는 운동권 학생들의 열망도 투사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신촌 전철역 1번 출구를 나와 현대백화점과 신촌 KFC 사이의 이면도로로 접어들면 금세 훼드라를 찾을 수 있다. 초빼이도 예전 그레이스 백화점이 있던 시절 훼드라를 마지막으로 찾았으니 무려 20년이 넘었다. 그 20 년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훼드라에 생긴 변화는 새로운 간판과 훼드라의 상징과 같은 1대 사장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2대째 사장님이 인수하여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전날 쏟아졌던 폭우의 잔재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기나긴 여름의 흔적이 한데 뒤섞여 기분 나쁜 오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흔적을 하나둘씩 정리하는 사장님의 등을 보며 가게에 발을 들였다. 활짝 열어놓은 문을 보며 아주 잠깐 '다른 곳으로 갈까?'하고 고민했지만 이미 사장님과 눈을 마주쳐 그 시간마저 놓쳐버렸다. 제 힘으로는 바로 서지도 못하는 선풍기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선풍기의 전원을 올린다. 이 가게의 연혁만큼 선풍기도 나이를 먹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이 짠하다. 

훼드라에서는 최루탄 해장라면과 계란말이가 필수다. 이 더위의 에어컨도 가동하지 않는 가게에서 그 매운 라면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고통일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드라에서는 최루탄 해장라면을 먹어야 한다. 그 옛날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청년 운동가들의 애환이 묻어 있는 음식이다. 라면에 듬뿍 넣은 김치와 땡고추가 너무 매워 마치 최루탄을 맞은 것처럼 콧물과 눈물을 자연스레 흘리게 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꽤나 소심하여 청년 운동가들과 함께 행동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투쟁을 마음속으로만 지지해 왔던 초빼이만의 때늦은 '오마주'이기도 하다. 


라면의 매운맛 단계를 선택하고 잠시 기다리니 계란말이가 먼저 나왔다. 계란 4개를 무성의하게 풀고 약간의 존재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파를 넣은 후 간을 한다. 이 집의 계란말이는 모양을 내고 돌돌 말아내는 다른 식당이나 주점의 그것과는 다르다. 낡은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모두 붓고 계란이 익어가면 딱 두 번 접어 모양을 만드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 계란을 뒤집개의 날로 오등분하여 접시에 올려 낸다. 두 번 말아 접는 행위조차도 계란말이의 모양을 만들기보다는 접시에 맞는 크기로 접는 느낌이랄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모양새다. 이 또한 빨리 음식을 먹고 가게를 나서야 하는 수배 중인 학생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란말이의 향이 꽤나 구수했던지 소주 생각이 났다. 저녁 무렵의 인터뷰니 "소주 한 병은 괜찮지 않겠냐"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최루탄 해장라면도 나왔다. 2대 사장님의 손이 꽤 빠르다. 오래된 라면 냄비에 콩나물과 매운 고추, 김치와 바지락 몇 알을 넣었다. 국물 한 수저를 떠 입에 넣고 '그리 맵지 않은데?'라는 생각을 할 순간쯤 매운맛이 '훅'치고 들어온다. 고추의 매운맛도 캡사이신으로 인한 것이라지만, 캡사이신만 인위적으로 추출하여 만드는 인공의 매운맛과는 차이가 있다. 날카롭지만 깔끔하다. 그리고 뒤끝(고통)도 강렬하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점점 옷을 적셔가기 시작할 무렵, 해장라면 손님 한 명이 더 들어오고 사장님과의 이야기도 시작되었다. 손님 한 명이 더 들어오니 그제야 문을 닫고 에어컨의 전원을 올린다. 1대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본인의 얘기를 절묘하게 이어 나가신다. 1대 사장님이 돌아가신 후, 위기를 겪던 이곳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수하게 된 사연, 바로 옆 골목에서 편의점을 운영하시며 전국 최상위 편의점으로 만들어냈던 무용담 그리고 당신의 자식들 사연까지 거침없이 풀어내신다. 2010년부터 지금의 사장님이 영업을 해 오셨으니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 책도 이젠 꽤 두텁다. 

1대 사장님 시절의 훼드라를 추억하며 찾는 연대 졸업생들의 이야기도 함께 덧붙이며 초빼이에게도 "연대 나오셨어요?"라고 질문을 던지신다. "아뇨 전 K대 나왔어요. 그래도 가끔 한 번씩 이곳에 들려 술도 했습니다"라고 답하니 "그럼 고연전 때 오셨겠네"라고 정답을 내놓으신다. 아직도 옛 기억을 떠 올리며 이곳을 찾는 졸업생들이 많다고 한다. 한 번은 LA에서 입국한 연대 졸업생 한 분이 입국하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훼드라를 찾아 해장라면을 찾았다며 그 시대의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 이젠 이곳밖에 남지 않았다며 아쉬운 소리도 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라면 몇 젓가락을 뜨니 그제야 냉장고 깊숙이 넣어 두었던 김치를 꺼내 주신다. 이 김치가 너무 많이 익어서 사람들에게 잘 내지는 않는다며 수줍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제가 여기서 훼드라를 운영하며 우리 아들은 박사까지 공부시켰다고 자랑까지 덧붙인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사실 우리 아들도 K대 나왔어요. 거기서 박사과정까지 다 마쳤어요"라고 고백한다. 인생이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에게 라면과 계란말이를 내며 상징적인 존재가 된 노포집 아들은 라이벌 학교를 다니며 또 하나의 인생을 그려 나간다. 한동안 독수리 다방도 K대 경영학과 출신의 사장님이 운영했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떠 올랐다.     


김치 맛이 굉장히 독특했다.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먹어봤던 기억도 있었다. "사장님 혹시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여쭤보니 내심 질문의 뜻을 이해했는지 "전 전라도 해남이 고향이지만 강원도 원통으로 시집가서 강원도식으로 김치를 만들어요"라고 간결하게 대답해 주신다. 그제야 어디서 이런 맛의 김치를 맛보았는지 기억이 났다. 


강원도 인제에서 군생활을 할 때 주말 종교행사를 나가면 가끔 옆길로 빠져 선임들과 함께 찾던 라면집이 떠 올랐다.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기와집에 간판도 없었던 곳이었지만 당시 그 근처 부대의 많은 병사들이 주말에 찾던 집이었다. 그 간판 없는 집의 늙은 할머니네는 배추김치와 열무김치를 찬으로 내주었는데 굉장히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1년을 넘게 묻어둬 익힌 그 집의 김치는 쉰 김치와 묵은지 사이 그 어디쯤 자리를 하고 있는 김치였다. 쿰쿰한 냄새(군내)를 내기 직전에 찬으로 냈는데 그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능력은 너무나 절묘했다. 그때 그 집의 김치와 훼드라의 김치맛이 거의 유사하다.  

5천 원짜리 라면을 파는 집에서 직접 만든 김치를 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똑같은 맛의 중국산 저가 김치가 나오는 것이 요즘의 실상이라 더욱 감동적이다. 황석어 젓갈과 멸치젓, 그리고 다른 한 종류의 젓갈을 쓴다는 그 김치는 찬으로도 내고 최루탄 해장라면에도 조금씩 들어간다. 고추도 농약을 쓰지 않고 해남에서 직접 재배한 고추를 가져다 쓴다며 자랑하신다. 라면에 넣는 고추의 색상을 보면 이 정도 색이 날 정도로 고추를 익히는 집들이 없으니 자신들이 쓸 요량으로 직접 키운 것이 맞다. 


라면을 다 먹은 손님이 자리를 비우자 옛이야기들이 봄날의 꽃망울처럼 더욱 화사하게 피어났다. 1대 사장님 이후로 14년을 운영해 온 사장님과 수다가 즐거웠다. 추억이 담긴 노포의 음식을 찾아온 나이 든 남자 하나와 오랜 노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사장님의 조합은 기묘했으나, 수다는 한 시간을 넘겨 지속되었다. 연대 출신의 유명 탤런트가 아직도 자주 찾는다는 고급 정보에서부터 손님으로 찾아오는 세브란스의 의사들이 일에 파묻혀 건강을 잃는 것이 너무 안쓰럽다는 이야기까지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말을 줄이고 사장님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드렸다. 손님이 뜸해진 한가한 시간, 조금은 외로움을 타셨던 것 같다. 대화의 상대가 있으니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래전 이곳을 찾던 이들은 이미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있고, 아직도 훼드라는 옛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영업을 지속하고 있다. 비로소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던 야은 길재 선생의 시조 자락이 조금 이해가 된다. 아쉬움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을 소주잔에 털어 넣고 남김없이 비웠다. 


먹었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정중하게 인사드리며 '훼드라'를 나왔다.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 뒤를 돌아보며 눈과 마음에 '훼드라'를 담았다. 오랜만에 따스한 라면을 먹었다. 초빼이의 마음속 '훼드라'에 대한 추억이 조금 더 진해졌다. 그거면 되었다. 

 

이렇게 2대 사장님의 '훼드라'는 또 다른 모습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 참고 1. 초빼이의 노포일기 - 경인편, 지방편은 전국 대형서점 오프라인에서도 구입 가능합니다.

  -  9월 21일 기준 [예스 24] 음식에세이 분야 판매량 1위, 2위를 나란히 차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 2. 지난주 연재한 초빼이의 노포일기 129회 "한 끼만 허락된, 택시 기사님들의 손박한 만찬"편을 

    무려 58,844명께서 찾아 주셨습니다.(9월 26일 기준) 이유는 아직 모르겠으나 너무나 감사합니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최루탄 해장라면 + 소주 또는 막걸리 

2. 2인 이상 방문 시 : 최루탄 해장라면 + 계란말이 + 소주 또는 막걸리

3. 3인 이상 방문 시 : 최루탄 해장라면 + 계란말이 + 기타 안주 + 소주 또는 막걸리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 공간 없음. 인근 백화점 주차장이나 공영주차장 이용.

2. 매일 00:00~24:00 / 연중무휴

3. 참고

    - 예전 최루탄 냄새 좀 맡아본 분들이라면 추억의 집을 찾아보시길. 

    - 매운 고추만을 사용한 깔끔한 매운맛이 인상적인 최루탄 해장라면은 별미다. 

      모 편의점에서 이 집과 협업을 통해 최루탄 해장라면을 출시하기도 했다.  

    -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남은 단골집이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대전해장국(닭발집), 한옥숯불돼지갈비, 연남서식당, 신촌형제갈비, 고바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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