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충북 제천시 청전동 황호식당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기나긴 여름은 흔적도 없이 떠나가고 가을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갓 찜기에서 꺼낸 듯 말랑말랑하기만 할 것만 같던 가을은, 어느새 단단하게 몸을 굳히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에 무관심할 줄이야. 단단해진 가을과 함께 미뤄뒀던 방학숙제 마냥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며 자신을 찾아오라 유혹한다.
얼마 전 주말, 초빼이도 행사가 있어 제천을 찾았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고속도로에 올라 제천으로 향하는 길은 예전에 제천을 방문했을 때 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아, 그 사이 이사를 했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운전대를 꼭 쥔다. 그동안 찾지 못해 멀어진 마음의 거리보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해 늘어난 물리적 거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고, 그렇게 믿는다. 몇 년만의 제천행이었다.
한참 산에 빠져있던 30대 시절에는 꽤나 자주 찾았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100대 명산 중 월악산과 금수산 두 곳이 제천에 있다 보니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캠핑을 즐기던 시기엔 청풍호 변의 캠핑장에서 달과 호수와 화로대를 바라보며 밤을 지새운 적도 꽤 많았으니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접한 원주시 신림면에서 송어 양식장과 낚시터, 그리고 펜션을 함께 운영하던 지인의 펜션(예전엔 오토캠핑장으로 운영했다)을 찾으면서도 자주 들리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제천이라는 도시는 초빼이에겐 행복했던 기억만을 선사해 준 도시다.
2시간을 넘게 쉬지도 않고 운전하여 제천에 도착하자마자 허기가 졌다. 행사 시간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 급하게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이른 새벽시간 문을 연 식당이라고는 해장국 집이 전부일터. 오랜만에 충청도를 대표하는 해장국인 올갱이 해장국집을 찾아 나섰다. 부산의 돼지국밥, 제주의 몸국, 대구의 따로국밥처럼 각 지역을 대표하는 국밥이나 해장국이 있는 것처럼 충청도에는 올갱이 해장국이 있다.
충청도는 아무래도 내륙지역이다 보니 올갱이가 유명했다. 깨끗한 물에서 자라는 올갱이(다슬기)는 주로 계곡의 바위틈이나 하천의 중, 상류 지역의 유속이 빠른 곳에 서식하는 생물이다. 껍질이 황갈색이고 표면이 매끈한 것은 충북 충주, 괴산, 제천 등 한강과 금강 상류지역에서 많이 나고 흑갈색의 껍데기가 두꺼운 올갱이는 경북 안동, 봉화, 강원 삼척 등 낙동강과 동해안 일대에서 주로 잡힌다. 경남에서는 '고둥(고동)', 경북에서는 '고디, 골배이', 전라도에서는 '대사리, 대수리', 강원도에서는 '꼴팽이, 달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중부지방 중 해산물을 접하기 힘든 내륙 지역인 충북과 영서에서는 '올뱅이'라 부르기도 했고, 옆 동네 괴산으로 가면 더 세분화하여 나누기도 했다. 껍데기가 오돌토돌한 작은 주름이 있는 것들은 '까끌이', 껍데기가 다소 맨질맨질한 것들은 '뺀질이', 중간 것은 '반 까끌이', 약간 둥그스름한 것은 '사발이'라 불렀다 한다. 물살이 빠른 곳 계곡에서 사는 뺀질이와 물의 흐름이 느린 하류에 사는 까끌이, 조금 깊은 수심에 사는 사발이 등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것은 '뺀질이'. 급한 물살을 견디고 바위에 붙어 있기에 살에 탄력이 있다. 게다가 노포와 같이 오래 산 올갱이들이 노화하면 표면의 주름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현지인들은 이런 올갱이의 가치를 가장 높게 친다고 한다.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어느 지역에서나 친숙한 식재료라는 의미이자 많이 활용되는 식재료라는 의미. 자주 쓰이고 많이 찾기에 용도에 따라 세분화된 셈이다. 짐작건대 충청도의 올갱이가 유명해진 것은 해산물이 귀한 지역적 특성상 올갱이라는 식재료를 타 지역에 비해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올갱이라는 식재료를 가장 잘 다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식당 옆에 주차를 하고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문을 여는 집이라 이미 앞선 손님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등산복을 입은 단체 손님들과 어젯밤 술자리의 여운을 그대로 안고 찾아온 남자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올뱅이 해장국을 주문했다. 이 집에서는 '올뱅이 해장국'이었다. 때마침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일행과도 연락이 닿아 그들의 한 끼도 같이 청했다. 일반 해장국 집과 달리 해장국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해장국을 계속 끓이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미리 만들어 놓은 국을 다시 뚝배기로 옮겨 끓여내는 듯하다. 매장 안을 가득 채운 해장국 향에서 흔히 접했던 보통의 올갱이 해장국과는 다른 무엇이 느껴졌다.
초빼이가 먹어본 올갱이 해장국은 가장 흔한 된장 육수에 부추와 아욱 등을 잔뜩 넣고 끓인 해장국이 전부였다. 때론 고춧가루를 넣기도 했고, 고추장을 풀기도 해 구색은 갖췄지만 제대로 매운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다진 고추를 따로 넣던, 된장이 기본이 되는 해장국이었다. 강된장의 진한 향과 맛을 기본으로 부추와 아욱의 기분 좋은 향 올려지고 올갱이 특유의 향이 빈 틈을 메우는 묘한 매력이 살아있는 음식이었다.
올뱅이 해장국이 드디어 앞에 놓였다. "올뱅이가 그 올갱이 맞죠?"라는 물음에 "여기선 올뱅이라 불러유"라는 대답이 드라이하게 테이블을 건너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몸에 밴 '쉬크(chic)'함이 살아있다. 그동안 먹어봤던 충주나 괴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제천식 올뱅이 해장국은 뭔가가 달라 보였다. 뚝배기 안에서 끓고 있는 국물에선 진한 고춧가루와 고추장의 향이 살아 숨 쉰다. 전분기 가득한 국물의 점성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진득함이 넘쳐흘렀다. 제천시 청전동 '황호식당'의 올뱅이 해장국이다.
이 집의 올뱅이 해장국은 '올뱅이 매운탕'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국물의 색과 맛이 독특하다. 보통의 올갱이 해장국보다 더욱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이 매력적이다. 자연스레 몸을 움츠리게 만들던 새벽의 선선함이 그래서 더욱 잘 어울렸다. 십몇 년 전 요맘때쯤 스위스 루체른의 리기산에 슬리퍼와 얇은 반팔차림으로 올랐다가 추위에 벌벌 떨며, '살기 위해' 마셨던 호박수프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 아직도 잊히지 않는 리기산 정상의 그 호박수프와 같았다.
황호식당의 올뱅이 해장국도 기본적으로 된장을 쓴다. 하지만 지금껏 맛본 다른 집의 올갱이 해장국에 비해 고추장과 고춧가루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 보통 고추장을 많이 쓰는 국물 음식은 '텁텁한 맛'으로 음식의 완성도를 해치기 쉬운데 이 집의 해장국에선 그런 걱정은 없다. 텁텁한 맛이 올라오기 직전, 시원함과 칼칼함이 만나는 그 경계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다. 눈으로 구분하기도 힘든 혈을 찾아 침을 놓는 숙련된 한의사의 무르익은 감각을 보는 듯하다. 사장님의 날카로운 감각이 만들어 낸 역작이랄까? 노포의 음식에서 이런 절묘한 맛을 찾아낼 때마다 초빼이는 극도의 쾌감을 느낀다. 사장님과 객(客)이 음식을 매개로 진정으로 공감하는 순간이다.
올갱이는 보통 봄이 시작되는 3월에서 11월까지 잡는다. 6월부터 9월까지 산란을 하고 돌 틈의 이끼를 먹으며 자생하기 때문에 민물 비린내가 있다. 게다가 하천의 바닥에서 자생하다 보니 모래도 많고 흙내도 심한 편이다. 그래서 이 흙내와 비린내를 잡는 것이 올갱이 요리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올갱이를 하루정도 물에 담가 모래와 이물질을 제거한 후 뜨거운 물에 삶아 속살을 빼낸다. 이때 올갱이를 삶은 물은 버리지 않고 거기에 된장, 고춧가루, 고추장, 다진 마늘, 부추 등을 넣고 삶는다. 이 과정에서의 각 재료의 비율이 올갱이 해장국의 맛을 결정한다. 누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황금 비율을 찾아내느냐가 관건인 셈. 보통 채소는 부추와 아욱 등을 주로 쓴다. 또한 올갱이는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까지 두른 후 국에 넣는다. 이 모든 과정이 민물 비린내를 없애고 올갱이의 식감을 살리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니 한 그릇의 올갱이 해장국을 만드는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다.
황호식당은 기본적으로 매운맛을 기본으로 하는 식당이다. 올뱅이 해장국 자체로도 칼칼하며 약간의 매운맛을 가지고 있고 더 매운맛을 선호하는 손님들을 위해 잘게 다진 매운 고추와 다재기도 준비해 뒀다. 찬으로 나오는 고추마저 굉장히 매운 녀석이라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꽤 호감을 가질만하다. 조금 늦게 합류한 일행도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꽤 마음에 들어 한다. "나도 올갱이 해장국 꽤나 먹어봤는데 이 집은 좀 다르네. 좋네"라고 덧붙인다.
해장국 하나만으로 이 집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부족할 것 같아 올뱅이 무침도 추가했다. 올뱅이 무침마저 부추와 갖은 채소 그리고 올갱이를 양념장에 버무리는 기존의 올갱이 무침과는 궤를 달리했다. 올뱅이와 채소, 양념장을 한데 넣고 데쳐냈다. 이 또한 올뱅이 무침이라기보다는 '올뱅이 데침'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음식. 살짝 데쳐냈기에 올뱅이와 부추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보통의 무침이 식감에 치중했다면 이 집의 데침은 향과 맛을 더욱 강조한 셈이다. 점점 사장님의 음식 솜씨가 마음에 들어온다. 올뱅이 해장국 국물의 황금비율과 올뱅이 무침을 데쳐내는 시간 조절이 거의 장인의 수준에 다다랐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사장님 영업 얼마나 하셨어요?"라고 물으니 "올해로 딱 31년째"란다.
그래 30년을 넘게 한 음식을 만들어 오신 분이라면 이 정도 기량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해장국 한 그릇을 그릇째 비우고 나오니 더 이상 새벽 공기가 두렵지 않다.
올갱이든 올뱅이든 그게 무어 중요할까?
이렇게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음식점이라면 도저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아침식사였음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거면 되었다.
* 참고 1. 초빼이의 노포일기 - 경인편, 지방편은 전국 대형서점 오프라인에서도 구입 가능합니다.
- 9월 21일 기준 [예스 24] 음식에세이 분야 판매량 1위, 2위를 나란히 차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 2. 지난주 연재한 초빼이의 노포일기 131편 "선선한 바람이 불면, 돌우동 한 그릇에 김초밥 한 접
시"편을 보며 아직도 돌우동의 추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초빼이는 이런 여러분의 공감 때문에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올뱅이 해장국 + 소주 또는 막걸리
2. 2인 이상 방문 시 : 올뱅이 해장국 + 올뱅이 무침(또는 올뱅이 전) + 소주 또는 막걸리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전용 주차공간 있음. 식당 건물 옆 6대 정도 주차 가능.
2. 매일 06:30~19:00 / 브레이크 타임 15:00~17:00 / 격주 화요일 정기 휴무(화요일 방문 시 사전 전화)
3. 참고
- 인근 킹즈락 골프장을 찾는 분들이 많이 찾는다.
- 올뱅이 매운탕이라 부르고 싶다. 칼칼하고 깊은 맛이 정말 예술이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송학반점, 보령식당, 삼정면옥, 물방아야식, 노송식당, 대영식당, 우성순대, 청기와생갈매기
식당, 대추나무집, 할머니손칼국수, 해동반점, 꽃댕이묵마을, 삼소라, 동원가든, 대보명가, 느티나무횟집
덩실분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