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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Oct 17. 2024

서울식 물갈비로 준비한 10월의 난로회(煖爐會)

133. 서울 중구 충무로 4가 충무물갈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일본처럼 육식금지령이 효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때는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로서 전국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 불교의 영향력 아래 육식 금지령이 적용되었다기보다는 육식문화가 쇠퇴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른다. 일본의 그것처럼 정부가 직접적으로 나서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유로 인해 사회풍조가 육식을 멀리하도록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일본에서도 다양한 편법을 사용하여 육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육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제례상에 올리기 위한 고기가 중요했었다. 당연히 고기를 잡고 먹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이념 중 하나인 '숭유억불(崇儒抑佛)'의 표현을 '고기를 먹는 행위'로 대신했다. 절 앞에서 어금니를 크게 벌려 고기를 씹는 행위인 '사문대작(寺門大嚼)을 통해 불교를 조롱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다양한 고기의 요리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각종 조미료와 조리도구의 발달도 요리법의 발달에 일조하였지만, 제례음식의 발달이 요리법의 발달을 주도했다. 그래서 조선의 제례음식은 조선 음식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고기 요리법도 다양하고 폭넓게 발전하였다. 


고기 요리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다양한 발전을 이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맛은 일부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다. 가축은 귀했고 식량 생산을 위한 주요 수단이었기에 함부로 도축할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한정된 고기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요리법을 찾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탕과 국 요리가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생겨난 음식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충무로 골목을 거닐었다. 거의 20여 년 만에 대학시절 선배와 술자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작년 초여름 즈음 선배 아버님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을 찾으며 잠시 인사만 나눴지만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작년부터 술 한잔 하자는 약속만 되풀이하다 드디어 이 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것.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욕심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조선조 선비들의 난로회(煖爐會)의 풍속이었다. 


난로회는 "한양에서 10월 초에 전골냄비에 쇠고기 등의 여러 재료를 넣고 육수를 부어 끓인 음식을 둘러앉아 먹던 풍속"을 말한다. 조선 헌종 때의 학자 홍석모가 한국의 열두 달 행사와 풍속을 기록했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에도 기록된 풍습 중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숯불을 지핀 화로를 가운데 놓고 번철을 올려 양념한 고기를 굽거나 볶아서 먹었는데 이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고기를 구울까 전골로 먹을까 고민하다 그 중간 형태의 음식인 물갈비가 좋겠다 싶어 충무로의 물갈비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때마침 10월이라 난로회라는 이름이 그리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충무로에서 40여 년 간 물갈비를 만들어 온 '충무 물갈비'를 약속장소로 정했다. 

퇴근시간보다는 조금 이른 오후 5시, 두어 시간 전 '동경 우동'에서 마신 정종 한 잔이 온몸의 미세혈관까지 퍼져 시간의 흐름을 조금씩 느리게 만들기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사실 초빼이는 물에 적신 고기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난로회의 정취를 한 번쯤 살리고 싶었기도 했다. 소주와 가장 기본 되는 물갈비를 주문했다. 

물갈비는 고깃국과 수육, 그리고 고기를 굽는 세 가지의 고기 요리 방법이 혼합된 요리이다. 

고깃국처럼 양념된 육수와 야채를 넣어 육수를 끓이고 그 육수에 수육처럼 오래 끓여 고기를 익힌 후, 육수가 졸아들 때까지 익혀 고기의 겉면에 조금 탄 자국을 낸다. 사실은 고기를 태운다기보다는 양념이 타는 것이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 가지 고기요리의 조리법을 취했으니, 그 세 요리의 식감과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물갈비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각 기관을 만족시키는 음식이기도 하다. 

우선 눈앞에서 끓어오르는 갈비 육수가 눈길을 끌고, 가위로 한 덩이씩 집어 자르는 과정과 상추에 고기를 쌈 싸서 먹을 땐 불에 구운 고기를 먹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또한 육수가 졸아들며 점점 짙어지는 달콤 짭짜름한 간장 졸이는 향에 후각적 만족감까지 얻는다. 어디 그뿐이랴 살얼음처럼 얇게 바닥을 채운 육수에 밥을 볶아 수저로 뜰 때 느끼는 그 꾸덕꾸덕함과 볶음밥을 입안에서 놀리며 삼킬 때 느끼는 그 뜨거운 쾌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탄수화물의 그 진득함마저 농축해서 담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난로회에 삼삼오오 모여, 화로를 가운데 두고 앉아 이 다채로운 감각을 즐겼을 테다. 유교적 관념에 충실하며 인간의 오욕칠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도록 교육받아 온 그들이 음식에 대한 탐욕을 드러낼 기회가 어디 흔했을까? 적어도 난로회의 음식 앞에서만은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을 따르기보다, 사대부 출신 첫 음식 칼럼니스트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던 허균이나 여섯 편이나 되는 시에서 '우심적(牛心炙)을 언급하며 탐했던 '조선의 소동파' 서거정, 그리고 음식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기술한 김유의 '탐식(貪食)'에 더 가까워짐을 느꼈을게다.  


게다가 10월이 어떤 계절이던가? 뜨거운 여름 볕은 이미 수그러들었고, 풍성한 곡식을 수확한 추석을 얼마 전 지낸 시기. 아직은 모든 것이 풍성한 때였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하고 높았고,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며 화롯불의 온기에 고기 굽는 냄새가 더해지면 더 이상 바랄 바 없이 행복해지는,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말로 하자면 정말 "야장 하기 좋은 시기"였다. 

그 10월의 좋은 시절에 선배와 나도 만났다. 야장은 아니었지만 활짝 열어놓은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저녁의 바람이 상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갈비가 익어가는 그릇은 옛적 난로회에서 쓰였다는 '돌전골틀'과 형태가 유사했으니 더욱 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야장이 아니었고, 소고기가 아닌 돼지갈비로 끓였지만 그게 뭐 대수랴? 옛사람(선배)을 만나니 그것도 좋았고, 20여 년 만의 술자리니 더욱 좋았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오랜만의 만남이라 조금 더 좋은 술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어차피 '과유(過猶)는 불급(不及)'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어느새 물갈비는 거의 다 비워졌고, 추가로 주문했던 새우 물갈비도 거의 다 사라졌다. 꽤 흥미로운 것은 이 집의 기본 물갈비는 간장 베이스의 육수를 사용하는 '서울식 물갈비'지만 추가로 주문한 '새우 물갈비'는 경상도식 물갈비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라는 것. 해산물이 풍부했던 경상도는 물갈비에 생선이나 해산물을 추가하기도 했었다. 이 또한 뭐가 문제일까?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이 집에서 물갈비를 먹을 땐 반드시 추가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동사리고 두 번째는 볶음밥이다. 그래서 물갈비만 주문하여 배부르게 먹으면 술자리의 말미에선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우동사리와 볶음밥을 먹지 않으면 이 물갈비라는 음식의 끝을 다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물갈비라는 음식은 '과유불급'의 음식이다. 하나의 완벽한 코스를 완성하기 위해 적절히 양을 조절해야 한다. 초빼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는 시기라 우동사리는 추가하지 않았다. 다행히 함께한 선배도 술을 탐하지 음식을 많이 탐하는 분이 아니어서 볶음밥으로 마무리하자는데 동의했다. 

물갈비 두세 점을 잘게 자르고 콩나물 등의 갖은 채소를 넣은 후 강한 불에서 밥을 볶는다. 볶은밥이 품었던 수분을 내뱉고 꾸덕꾸덕해지면 거대한 도넛 형태로 법랑 철판에 모양을 잡고 가운데 빈자리에는 계란 한 알을 깨서 올린다.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도 고려해서 절반은 피자용 모차렐라 치즈를, 나머지 절반엔 김가루를 올린다. 조금씩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불을 끈다. 그러면 볶음밥은 완성. 다시 시작이다. 이 날은 볶음밥 안주에 소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이 선배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복학한 분이라 정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분이었다. 초빼이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하였고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 분은 이미 졸업까지 했었던 것. 다시 복학한 후 한두 번 뵙기는 했으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와 같았다. 첫 직장 취직부터 시작해서 결혼과 출산, 육아와 자식들의 진학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물갈비집 테이블 위에서 두 시간으로 압축되었다. 


난로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지난 1년간의 일들을 10월 어느 좋은 날 저녁에 만나 맛있는 음식과 술을 곁들이며 하나씩 풀어가는 자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안부를 묻고, 그렇게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고 서로의 삶을 보듬어가는,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와의 함께했던 10월의 술자리는 난로회의 목적에 정말 충실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면 되었다. 이 만남이 내년에 다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어질지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만남의 의미와 목적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끊어질 염려는 없었다. 


아제부터 10월은 내게 물갈비가 좋은 계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물갈비 집에서 지인들과 그간의 안부를 묻고 즐기는, 나만의 난로회를 개최하기 좋은 시간이 되었다. 저 조선의 선비들이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고기와 술을 기울이며 그러했던 것처럼. 


* 참고 1. [초빼이의 노포일기 북토크 - 인천] 공지

  - 일시 : 10월 26일(토) 13:30부터 

  - 장소 : 인천 [개항도시] (주소 : 인천시 중구 개항로 72-1)

  - 참가신청 및 세부안내 :  docs.google.com/forms/d/1tBifL7DqhEBpGW72aFHAG2QY1xtRYYZOfe9ILnmYFH0/edit 

* 참고 2. 드디어 초빼이의 노포일기가 2쇄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메뉴추천]

1. 2인 이상 방문 시 : 돼지 물갈비(또는 새우 물갈비) + 우동사리 추가 + 볶음밥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공간은 없음.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2. 월~금 11:50~21:30, 토 11:50~20:50 / 브레이크 타임 14:30~17:00(월~금), 15:00~17:00(토) 

    라스트 오더 20:30(월~금), 19:50(토) / 매주 일요일 정기 휴무

3. 참고

    - 고기는 처음엔 직원분께서 직접 구워 주신다. 

    - 우동사리와 볶음밥을 감안하고 주문할 것. 모두 먹어야 이 집에서 제대로 물갈비를 먹은 것이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진고개, 토종한방고려삼계탕, 실비식당, 필동면옥, 필동분식, 필동해물, 동원집, 청해, 사랑방

      칼국수, 황평집닭곰탕, 산수갑산, 영덕회식당, 을지오뎅, 안동장, 농가순대국, 충무로쭈꾸미불고기, 호남

      식당, 동경우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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