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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의 평양냉면집,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

180.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원조평양냉면옥본점(元祖平壌冷麺屋本店)

by 초빼이

[조선의 찬국수, 냉면(冷麵)]


냉면(冷麵)은 '차가운 면'이라는 뜻의 음식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냉면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면요리'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즐기는 냉면과는 달리 위의 정의처럼 면을 차갑게 먹거나 차가운 국물에 말아먹는 모든 음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냉면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음식이기도 하다.


'차가운 면'에 대한 첫 언급은 세종 조의 전순의('의방유취'의 편찬자 중 1인)가 저술한 <산가요록(山家要錄, 1450. 세종 32년)>에서 찾을 수 있다. '냉면(冷麵)'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조선 인종 때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이문건(1494~1567)으로 그의 일기 <묵재일기(默齋日記, 1545~1567)>에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고조리서인 음식디미방 등의 다양한 문헌을 통해서 '차가운 면 요리'의 소개가 이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냉면은 지금의 냉면(평양냉면)이 아니었다.

면을 얼음물이나 차가운 물에 넣어두었다가 장국이나 오미자차에 말아먹는,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 요리였다. 면의 재료로는 밀가루를 쓰기도 했고 메밀을 쓰기도 했다. 콩가루나 쌀가루, 전분가루 등 다른 곡식들도 더러 사용되었다. 밀가루는 관료들의 녹봉으로나 쓰일 정도로 귀했기에, 메밀의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현대의 냉면'과 유사한 형태의 메밀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18세기 중반 의관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를 저술하는데, 여기에 처음으로 오늘날과 유사한 방식으로 '메밀국수를 만드는데 [국수틀]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가 등장한다. 메밀틀은 북경으로 가던 사신단이 중국에서 메밀국수를 만드는 메밀틀을 보고 들여온 것이라 하는데, 평안도에서 유명해진 이유는 그 사신단의 상인과 하인들이 거의 평안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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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일기 / 증보산림경제 (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문제가 있을 경우 삭제하겠습니다)

18세기에는 이미 이북지방에서는 현재와 유사한 방식으로 국수틀에서 메밀국수를 뽑아 국수를 먹는 방법이 널리 퍼져있었다. '빙허각 이 씨(1759~1824)'가 저술한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 권 1>에는 동치밋국에 만 냉면에 대해 소상한 언급이 등장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18세기말 경에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동치미 국물에 국수틀로 내린 메밀국수로 만든 냉면(冷麵)'이 그 자리를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미 그 시절에 평안도의 냉면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음식이 되었다.***

(*,**,*** 내용 일부 참조. 강명관. 냉면의 역사, 푸른역사, 2025.10.06)



[평양냉면(冷麵)의 대중화와 디아스포라(Diaspora)]


평양의 냉면은 19세기에도 조선의 문인들이 즐기던 음식이었다. 지배계급인 양반들이 즐기던 음식이다 보니 19세기 경에는 이미 평양냉면 집이 도성인 한양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 조선의 각지에 냉면집이 생겨났고 전문적으로 냉면만 만드는 전문점도 등장했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냉면은 장터(시장)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건면(乾麪)이었다. 장터로 진출하기 시작한 냉면은 대중화의 첫 발을 뗀 것이다.


20세기 초, 첫 번째 '평양냉면의 공습'이 조선 땅에서 일어났다. 대중화된 '얼음'과 '아지노모토(味の素)'가 평양냉면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당시 유행을 쫓던 '모단보이'들은 전날 거하게 술을 마시고 유행처럼 평양냉면을 배달시켜 해장하기도 했다. 1910년대 평양에는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 생길 만큼 평양냉면 집은 성황을 이뤘고, 대중 외식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일본의 조미료 회사 '아지노모토'가 조미료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평양의 냉면집 32개를 모아 '평양면미회'라는 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1925년에는 평양냉면 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면옥 노동조합'을 세웠는데 그 조합원의 수가 100명을 넘기도 했다. 심지어 1931년도에는 평양 시내 냉면가게 노동자 100명이 '업주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항의해 동맹파업을 했다는 기사도 있다.(기사에 따라 200명을 넘게 잡기도 한다). 이들은 노동조합 창립 1주년 기념행사도 가졌고 십시일반 하여 자신들의 노동조합 사옥까지 구매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미 평양냉면 업종에서 일종의 산업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아지노모토 광고사진_냉면.jpg 아지노모토 + 냉면집 광고사진(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문제가 될 경우 삭제하겠습니다)

1920년대에는 평양의 냉면업자들이 극심한 경쟁으로 '레드 오션'이 되어버린 평양을 떠나 경성(지금의 서울)과 타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1920년대 말에는 청계천 북쪽에만 40여 곳이 넘는 냉면집이 성업 중이었고, 낙원동의 '부벽루', 광교와 수포교 사이의 '백양루', 돈의동의 '동양루'가 대표적인 경성의 평양냉면집으로 이름났다. 생계를 찾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로 향했다.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으레 냉면집이 들어섰다.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시작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안둥현과 선양, 북경, 허베이성, 미국의 하와이, 그리고 일본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한민족의 이동에 따라 '냉면의 디아스포라(Diaspora)'도 이뤄진 것이다.


오늘 소개할 집은 이 시기 일본 고베(神戸)로 진출한 우리나라 평양냉면집이다.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에 있는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元祖 平壌冷麺屋 本店, 간소 헤이조레이멘야 혼텐)'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평양냉면 집]


평양냉면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은 어디일까?

공식적인 기록으론 서울의 '우래옥'이 1946년 창업한, 가장 오래된 냉면집으로 꼽힌다. 비공식적으로는 '초빼이의 노포일기- 지방편'에서도 소개한 적 있는, 대구 중앙로의 냉면노포 '부산안면옥'(1905년 창업)을 꼽는다. 다만 평양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다시 대구로 영업장을 수시로 이주하였고, 중간중간 영업을 중단한 시기도 있어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타이틀을 움켜쥘 수 있었는데, 이 부분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 집'을 찾기 위해선 우리는 일본의 고베시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간사이 지방과 오사카만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효고현 고베시(神戸市) 나가타구의 신나가타역 인근에 있는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元祖 平壌冷麺屋 本店)'이 바로 그곳이다. 1939년 창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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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1대 사장님 '장모란 할아버지(1959년 작고)'는 생계를 위해 평양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 고베에 정착했다. 먹고사는 것이 만만치 않자 나가타구 해안 인근에 야키니꾸와 평양냉면을 내는 집을 열었다.(지금의 자리와는 다른 곳이다) 원래 1대 사장님은 평양에서 냉면집의 배달부로 일했다고 한다. 그 시절 어깨너머로 틈틈이 냉면 만드는 법을 배웠고, 일본으로 건너와 자신만의 평양냉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 참조. 박찬일,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모비딕북스/타이드스퀘어, 2019.01.30)


당시 일본의 효고현(고베)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후생성(厚生省)이 조사한 '조선인 노동자 조사명부(1946년, 16개현의 조사기록만 남음)'를 바탕으로 한 '지역 연구'에 따르면 '효고현 내 조선인 노동자 수'는 122개 사업장에서 13,424명이었다. 이들은 공장 노동자 8,931명(67%), 광산 노동자 3,157명(24%), 교통, 토목, 부두 노동자 1,336명(10%) 등으로 조사되었는데, 해당 조사 자료가 남아있는 16개 현 중 효고현이 가장 많은 인원수를 기록했다. 게다가 이 조사는 일본 패전 직후, 조선인들의 귀향 이후에 이뤄진 것으로 실제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1945년 종전, 혼란으로 인해 72만 명 이상이 급감'했다는 해석도 달려있다)


당시 고베는 조선소, 조선 기자재 공장, 제강, 항만, 고무공장(고무공장은 해방 이후)이 집중된 곳으로 효고현 내 다수의 조선인들이 고베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나가타구(長田区, Nagata-ku) 인근이었는데, 특히 고반초(五番町)·로쿠반초(六番町) 지역이었다.(2010년 기준으로 나가타구의 거주자 중 4.6%가 한국 또는 조선인이며, 이는 효고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기도 하다.)* 이곳에 머물던 조선인들은 당연히 이 식당의 단골이 되었다. 고향 땅 조선에서 즐기던 평양냉면과 고기구이를 조선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어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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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원조 고베평양냉면 / 모리오카 냉면 / 벳푸냉면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의 냉면은 철저히 평양냉면의 문법을 따르는 냉면이다. 수타 메밀면과 동치미 국물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원조(元祖)'라는 이름을 상호 앞에 달았다. 처음에는 '일본에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소개한 집'이라는 의미의 원조였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이라는 의미의 '원조'가 되었다. 1대 사장님이 작고하시고 그 뒤를 이어 며느리인 김영선 할머니께서 2대째 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분의 아들(장수성씨)과 손자까지 대를 이어 4대째가 운영 중이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외로 일본에도 '냉면'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다. 대략 3개 지역의 냉면이 유명한데, 이 냉면의 공통점은 바로 한국이 그 원류라는 것이다. 고베에 있는 평양냉면과 일본 북부 모리오카 지방의 '모리오카 냉면(盛岡冷麺)' 그리고 규슈 벳부의 '벳부 냉면(別府冷麺)'이 대표적이다.


고베의 평양냉면은 '장모란' 사장님이 원형 그대로 일본으로 들여와 평양냉면의 계보를 이었고, 모리오카 냉면은 1954년 함흥 출신의 양용철 사장님(楊龍哲, 일본명 青木輝人, 아오키 데루토)이 '식도원(食道園, 쇼쿠도엔)'을 개업하며 '모리오카 3대 면 요리'로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벳부 냉면은 1950년 전후, 만주 일대에서 돌아온 일본인 귀환자들이 한국의 냉면을 참고하여 일본에 맞게 현지화하며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정착시킨 음식이다. 냉면의 종주국인 한국이 아니라 옆나라 일본에서 평양냉면과 함흥냉면(모리오카 냉면, 원조 평양냉면이라고 상호는 붙였으나 함흥냉면처럼 감자전분과 밀을 혼합한 면을 사용), 그리고 일본인이 만든 현지화된 냉면(각자의 육수 사용, 양배추 김치, 소고기 챠슈 사용)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각축을 벌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냉면의 국제화와 로컬라이제이션이 이뤄졌다.

로스(ロース)와 가루비(カルビ)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元祖 平壌冷麺屋 本店, 간소 헤이조레이멘야 혼텐)]


고베에 도착한 날 첫끼는 반드시 이 집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 집을 찾기 위해 고베를 취재지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 집'이라는 수식어의 유혹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냉면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전철역에서 한참을 걸어 냉면집 앞에 섰다. 생각보다는 작은 규모의 매장에 조금 놀랐다. 한국의 냉면집들이 넓은 매장과 엄청난 개수의 테이블을 놓고 영업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을 한참 지난 시간이라 매장은 조금 한가한 편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주방 쪽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늦은 점심을 위해 찾은 손님 몇 분이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베의 뜨거운 햇살에 지쳐 기운을 차리기 위해 맥주와 고기를 먼저 주문했다. 초빼이가 좋아하는 로스와 가루비 1인분씩. 로스의 기름진 풍요로움과 가루비의 감칠맛에 젓가락이 절로 움직였다. 특히 로스는 정말 부드럽고 육즙이 넘쳐 만족스러웠다. 시작이 좋았다. 이 집은 로스가 더 마음에 들었다. 타레가 조금 독특했다. 다른 야키니쿠 집의 타레와는 조금 다르다. 약간은 촌스럽지만 맛있는 그런 타레다.


일본의 식당에서 처음 받은 음식과 찬이 한국식이라 색다른 느낌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국의 땅에서 처음으로 한국사람을 보았을 때의 그런 느낌이랄까? 백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를 그대로 수분만 제거하고 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숙성의 맛은 조금 떨어졌다고 할까? 한국의 백김치와는 조금 다른 맛이었지만 신선한 배추의 맛과 향이 도드라졌다. 백김치라기보다는 배추절임(白菜漬け, 하쿠사이츠케)에 가까웠다. 일본에서 오랜 시간을 영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바꿔야만 하는 그런 부분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입맛보다는 현지인의 입맛을 맞추는 것이 우선이지 싶었다. 단출하고 소박한 배추절임은 고기를 먹고 난 후 기름기 가득한 입안을 깔끔하게 씻어주는 청결제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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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절임과 아키니쿠에 정이 들기 시작할 무렵, 기다리던 '원조 평양냉면'이 나왔다. 나에겐 '원조 평양냉면'이라 의미 있었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겐 '간소 헤이조레이멘'이다. 평양냉면 집에선 으레 하던 대로, 그릇을 양손에 잡고 육수를 들이켰다. 한국의 평양냉면 육수에서 느낄 수 있던 육향보다는 동치미의 비중이 더 컸다. 예전엔 고기, 특히 소고기가 귀해 육수의 비중보다는 동치미의 비중이 더 높았다. 육수를 쓰지 못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만 적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냉면이 그러지 않았는가? 육수의 맛을 처음 보았을 땐 조금 의아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치미 국물 맛이 더 강한 것이 원형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치미와 육수 비율은 3:2 정도로 맞춘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평양냉면의 원형(原型)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은 이외로 신맛과 단맛을 함께 담고 있었다. 특히 단맛이 조금 더 강했는데, 그동안 심심한 평냉 육수에 익숙해졌던 초빼이의 냉면 미각에 큰 파장을 남겼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단맛과 짠맛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의 기호에 적응한 게 아닐까 하고 잠깐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단맛의 강도가 조금은 약했다. 인위적인 단맛이라기보다는 잘 숙성된 동치미 자체가 가진 단맛에 가까웠다. 동치미의 깔끔한 맛이 고기 육수가 함부로 나대지 않게 잘 잡아주었다. 중심을 잡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리라. 한 자리에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리라. 사람이 사는 곳이든 음식이든 그 어느 곳에서든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릇을 내려놓고 면 그릇을 바라보았다. 면 위로 드리워진 고명들이 참으로 낯설면서 반갑다. 동치미에 함께 넣었을 배추와 돼지고기, 그리고 소고기 수육이 견고한 벽돌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한편으로는 신선한 빛깔의 노른자를 빛내고 있는 삶은 계란 반쪽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혹시 이 조합이 심심할까 약간의 실파와 고춧가루가 대비를 이루며 꾸밈음처럼 올라가 있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돼지와 소, 그리고 닭(계란)의 조합을 맞춘 고명이다. 닭 가슴살이라도 조금 올렸다면, 어쩌면 이 음식의 이름이 '오야꼬 레이멘(親子冷麺)'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며 마음속으로 너스레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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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쫄면의 면과 같은 모양새의 메밀면은 가장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이 빛났다. 마치 사라시나 소바나 니하치 소바의 하얀 면을 보는 듯 백색의 면(麵)이 빛나고 있었다. 메밀의 거피를 제거하고 속만 곱게 도정한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섞은 것 같은 면이다. 일본의 '니하치 소바(二八そば)'는 메밀과 밀가루의 비율이 8:2의 비율이라고 하는데 원조 평양냉면의 면은 메밀과 밀가루의 비율은 3:7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는 평양냉면의 전통보다는 일본이라는 환경의 영향을 더 받았던 것 같다. 일본의 패전 후 미국의 무상원조로 풀린 밀가루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을게다. 현재는 미국의 밀이 아니라 호주의 밀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겠지만.


면의 탄력이 장난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치 쫄면이나 밀면을 먹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면의 탄력이 좋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입안에서 파드득거리며 요동치는 느낌이다. 냉면이 살아있다. 한동안 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두로 떠돌던 메밀과 밀가루의 비율 논쟁이 무의미해 보였다. 이곳은 그런 논쟁에서 완전히 벗어난 면을 만든다. 논쟁의 바깥에 서 있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웠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롯이 빛나 보였다. 원조라는 이름을 가진 원형의 앞에서는 육수의 비율이나 면의 구성을 따지는 게 무의미했다. 그런 싸움은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사장님의 충고대로 겨자와 식초를 넣어 먹으면 또 한 번 맛의 변화가 일어난다. 조금 더 익숙한 육수가 만들어진다. 이 부분은 우리네 냉면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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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사진 원조평양냉면옥 본점 옛 사진(출처 :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 X(구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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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사진 : 전용 주차장에 방치된 옛날 입간판

잘 만든 냉면 한 그릇을 먹었다. 더 이상 평양냉면의 원형을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지해 온 것인지는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 집은 그 존재 자체가 축복이자 은혜였다. 한국의 평양냉면들이 지켜온 문법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한국의 냉면집들은 이 집의 아류가 아닌가? 그것이 노포가 지니고 있는 숭고한 가치다. 홀과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가게를 나섰다. 또 하나의 경험과 지식이 초빼이의 노포일기에 한 겹을 더했다.


아, 단 하나 아쉬웠던 것은 원조 평양냉면의 전용 주차장 한 구석에서 옛 간판으로 보이는 입간판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랜 시간을 지켜온 시간의 훈장처럼, 그마저도 간직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조금 올랐다. 개항장 고베에서의 첫 식사처다.



[추가 팁]

1. 매장명 : 원조 평양냉면옥 본점(元祖 平壌冷麺屋 本店)

2. 주소 : 6 Chome-1-14 Hosodacho, Nagata Ward, Kobe, Hyogo

3. 영업시간 : 수~월 11:30~20:00 / 정기휴무 화요일

4. 주차장 : 전용 주차장 유.

5. 참고

- 예산 : 1인당 1,000~2,000엔.

- 연락처 : +81-78-691-2634

6. 이용 시 팁

- 물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을 위한 비빔냉면도 판매한다.

- 야키니쿠집도 겸하기 때문에 냉면으로 부족한 분들은 고기구이 주문도 가능.

- 박찬일 셰프의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에서는 냉면 대(大) 사이즈를 주문하면 갈비 조각을 고명으로

준다는 말도 쓰여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https://maps.app.goo.gl/oCyCF96iJgA34aRw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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