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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의모든지식 Aug 04. 2021

활명수를 팔아 독립운동!

[활명수 시리즈 #2]

활명수는 사실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화약방을 설립한 민강은 국운이 기울던 1909년, 안희제, 김홍량, 김동삼, 오상근 등 80여 명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1910년, 경술국치가 시작되자 민강은 남대문 밖에 소의학교를 세워 후세교육에 힘을 쏟았다.

동화약방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상해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담당했던 ‘서울연통부’ 사무실이었다.

1920년대에는 판매 수익의 일부를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지원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던 일제의 눈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 민강은 현금전달이 불가능하다고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활명수를 만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만주 현지에서 활명수를 팔아 현금을 마련하고 그 현금을 임시정부 운영비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활명수의 효능 덕분에 만주에서도 아주 잘 팔렸고 활명수의 수익금은 독립운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1919년 11월, 민강은 고종의 아들 이강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한 망명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에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민강은 체포당하게 되고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에도 후세교육에 힘쓰며 항일투쟁을 계속 해오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게 되고 1931년 결국 옥중에서 순국하게 된다.

민강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동화약방도 경영도 점차 어려워졌다. 10,000원이 현 시세로 1억 원 정도 되던 1936년 당시, 동화약방의 매출은 43,000원 정도였는데, 부채는 80,000원에 육박하며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던 1937년, 보당 윤창식이 동화약방을 인수했다. 

그 또한 독립운동가로 많은 활동을 했던 민강의 애국 동지였다. 그는 회사가 어려워지면 나라를 구하는 일도 어려워진다고 생각했고 회사를 재건하기 위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사규를 재정하는 등 체계적 경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1937년 7월 27일, 활명수는 만주국에 정식으로 특허를 출원하게 되면서 국내 최초로 해외상표등록을 한 제품이 된다.

그렇게 윤창식의 진두지휘 하에 활명수는 계속해서 고속성장 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 이후 이어진 6.25 전쟁을 통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국 시장을 잃게 되고 서울 순화동에 있던 공장도 완전 파괴되며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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