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경제를 배우게 된 청년의 이야기 - Chapter 2
동대문이라고는 군대 가기 전에 옷 사러 한, 두 번 와본 밀리오레, 두타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서울 촌놈에게 새벽 도매시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 안 되는 불빛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지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국어...... 너무 낯설고 정신없는 이곳이 그저 멋있다고 생각됐고 여기 아무런 위화감 없이 서있는 쓰레기통 마저 부럽다고 느껴졌습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출근하면 집하장에(집하장이라고 해봐야 길에다 노란 페인트로 박스를 그려둔 게 전부였습니다.) 있는 엄청나게 쌓여 있는 대봉(옷이 가득 담긴 큰 봉투) 사이에 매직으로 쓰인 우리 가게 상호를 찾아서 가게로 나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1시간이 조금 넘게 나르고 나면 날씨 영향도 있겠지만 온몸은 출근하자마자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물건을 가져오자마자 형들은 대봉을 뜯어 물건을 진열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그냥 포개진 채로 몇 백 장의 티셔츠를 가판에 올려 두는 게 전부인데 기다렸던 사람들이 미친 듯이 가져갑니다. 하루하루 이곳에 동화되고 있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고 좋았습니다.
그 흥분에 일조를 해준 우리의 상품! 없어서 못 판다는 그 시절 최고의 히트 상품 “붉은 악마 티셔츠”
정신없는 와중에 매장 전화기는 불이 나고 우리 사장님이 운영 중인 다른 가게에서 전화가 오면 저와 막내 직원은 1시간이나 옮겨둔 대봉을 하나씩 둘러메고 뛰다시피 출발합니다.
정말 폭풍 같은 3~4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장사를 하고 싶어도 물건이 없었고 숨 돌리며 모여 앉아 간식을 먹으면 1시간 정도 있다가 사장님이 와서 매출 수금을 해갑니다. 하루 매출 수백만 원이 찍히는 매장을 내가 아는 것 만 13개나 운영하는 사장님을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르바이트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안돼서 뛰어다니는 게 익숙해질 무렵 일이 끝나고 전체 회식이 있었습니다. 무려 사장님이 함께 하는 회식자리! 사장님과 가장 멀리 자리한 탓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려주듯 모두 집중해서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30대 중반이라는 소문만 들은 그 멋진 형님 아니, 사장님은 중요한 안건이 있다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제 월드컵은 종반을 향해 가고 있고 빨간 티는 원단 수급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지금 확보된 물건과 원단을 끝으로 붉은 악마 티셔츠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해서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지금 있는 수량으로만 장사를 할 거고 도매가 아닌 소매로만 판매를 한다. 노방 자리(길거리에 있는 가판 자리)는 마련해뒀으니 내일부터 한 자리 당 3인 1조로 노방 장사를 하겠다.
알바를 포함한 인원수로 총 5개 조가 나왔고 출근하면 배분하는 수량을 확인하고 장사가 끝나고 나면 남은 수량은 반납, 판매된 수량은 장당 고정된 가격으로 계산해서 입금하면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조가 더 높은 가격으로 팔면 마진이 남게 되고 그건 우리 조의 몫으로 준다는 얘기였습니다.
심장이 요동쳤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꿈틀대고 있던 중에 장사를 해볼 기회가 왔다는 것과 또 고정된 일당은 없으나 경험상 저 빨간 티셔츠는 더 많은 돈을 내게 벌게 해 줄 거라는 기대에 회식 자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경력이 오래된 형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눈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두의 머릿속이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술을 마시고 있긴 한 건지 취하지도 취할 수도 없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러 가자며 제 각각 사람들을 불러내고 있었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팀을 짜기 위해 불러내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비공식이지만 회식 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조 편성은 끝난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여 앉은자리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택지가 없어 누군가 데려가 주기만을 바라고 있던 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준 형 그리고 내 또래 친구 한 명과 조를 이루었습니다. 1년 경력의 형이 우리 조의 기둥입니다. 다른 조에 비하면 턱없는 경력의 팀장 그리고 신참 알바 두 명 정말 최악의 조였지만 다른 조에 껴들 친분도 없고 원래 알고 지내던 형을 떠날 이유도 실력도 없었기에 파이팅 하자는 말로 팀 구성에 대한 불만보다 희망에 대한 기대를 높여갔습니다.
소매 장사를 해야 하는 특성상 막차를 타고 출근했던 시간은 해가 지기 전으로 바뀌었고 동대문 시장에 뿔뿔이 흩어진 자리는 뽑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하루에 분배되는 티셔츠의 총량은 정해져 있었고 먼저 파는 순서대로 물건을 더 가져갈 수 있고 그때마다 중간 정산을 해야만 물건을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파는 사람이 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욕심보다 좀 더 낮은 마진으로 판매를 시작했고 운 좋게 뽑은 자리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서 기분 좋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생각한 거보다 장사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들뜬 마음으로 일을 했고 그렇게 첫날은 끝이 났습니다. 장사가 끝나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다른 조의 조장인 최고참 형이 밥을 산다고 해서 다 같이 식당으로 이동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하루에 정해진 수량이 있고 그 수량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원래 받던 일당을 생각해 본다면 계산해서 최저 판매 가격을 정해야 하고 그 이하로는 팔면 안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게다가 이건 돈을 벌 기회니까 일당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그 최저 가격을 결코 낮게 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죠. 첫날 다른 조에서 저 마진으로 박리다매 판매한 것을 두고 불만이 나왔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문제는 그 조가 대부분의 수량을 빠르게 소진했기 때문에 다른 조는 적당한 가격에 판매가 잘 되어도 물건이 없어서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일당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가져가는 조가 생겨났고 했고 모두가 보복성 박리다매 방식을 취한다면 전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를 같은 편으로 본다면 판매전략의 조정이고 모두를 경쟁자로 본다면 흔히 말하는 가격 담합이 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언성도 높아져 갔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이 빨간 티를 우리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시장 전체의 물량 중에 꽤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우리 입맛대로 모든 걸 정해도 판매가 계속 잘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논의하기 위한 자리 같지만 실상은 몇몇 조들의 분풀이 대상을 정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별생각 없이 그냥 오늘은 장사가 잘 안 됐지만 내일은 잘 되겠지 하고 있던 나는 하루 만에 원망의 대상과 문제 해결을 위한 논쟁을 하는 속도에 시장이 가진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박리다매 판매를 한 조에게 집요하게 원망을 쏟아내는 누군가 때문에 점점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 누구도 수긍할 만한 결론을 말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자리는 끝이 났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날 모든 조가 똑같은 수량을 배분받는 걸로 사장님이 결론을 지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치열했던 논의가 의미가 있었나 싶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그런 직설적인 자리가 있었기에 빠르게 중재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니 월드컵의 열기는 한창임에도 빨간 티는 점점 귀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점점 비싼 가격을 불러도 거의 하루 물량을 손쉽게 판매했고 어떤 날은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다른 가게에서 우리 물건을 흥정 없이 모두 사 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4강에서 패배해 한풀 꺾인 월드컵의 열기를 느낄 때쯤 빨간 티 장사를 모두 마무리했고 인생 처음으로 느껴본 초대형 이벤트는 제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기고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동대문에서 알바가 아닌 직원으로 남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