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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Nov 06. 2023

주전자

조용한 실내를 유지하기

주전자가 끓는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김을 뿜으며 폭발하듯 경련하던 그것은 아니다. 유리 몸통의 전기주전자는 파란빛을 내며 한숨을 쉬듯 부르르 끓어오른다. 커피를 따랐던 컵에 끓인 물을 붓고 어디다 벗어 뒀는지 몰랐던 슬리퍼를 그 앞에서 찾아 신는다.

주전자는 다 이루었다는 듯 잠잠하다. 마치 두꺼운 책을 다 읽어버린 고등학생처럼 지친 듯, 이런 걸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다. 안쪽으로 물방울이 맺혀 흐른다.

주전자 앞에서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렇게 긴가. 실제로는 이 분여 남짓한 시간인데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난 척하듯 일부러 천천히 끓는 것 같다. 주전자 옆에는 반쯤 남은 꿀병과 원두를 사고 받은 커피드립백과 비타민제가 나란하다. 컵에 꿀을 한 스푼 넣으려다가 만다. 컵에 말라있던 커피얼룩이 녹아 물은 연한 보리차처럼 보인다.


물이 끓고 주전자가 비워지자 소파에 기대 잠을 자고 있던 아이의 숨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린다. 몸을 비틀어 반대쪽으로 눕는 아이의 옆얼굴이 낯설다. 이마를 찡그리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는 다시 돌아눕는다. 주전자 앞에서 아이의 숨소리를 듣는다. 누군가가 토닥거려 재운 듯 마시고 내쉬는 숨들이 조용해진다.

주전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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