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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lon easy Nov 26. 2021

Secret Peru

Cusco_Puno_Arequipa_Ica_2011 Peru

Prologue


한 학기 미뤘던 논문을 쓰느라 정신없는 2010년 하반기를 보낸 후, 오랫동안 친구들과 별렀던 여행을 떠났다. 출장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온 후 술자리에서 풀어놓은 무용담들은 구체적인 여행 계획으로 바뀌었고, 홀가분한 여행으로 꼭 다시 가고 싶었던 곳들 중 페루로 첫 행선지를 정했다. 버라이어티한 기후와 문화, 지역적인 특색이 있어서 짧은 시간에 다양함과 재미를 풍부하게 느끼기 가장 좋은 곳. 2주간의 일정을 짜고 이동과 숙소 등을 계획하는 건, 그간 아는 척을 엄청 해댔던 내 몫이었고 여행사 업무를 하다 보니 가이드북까지 만드는 짓을 하고 말았다. 지금처럼 좋은 어플과 데이터 환경이 있었던 때도 아니어서 안내서가 필요했었고 특히 자꾸 묻고 기억 못 하고 자주 귀찮아하는 일행들에겐 이런 족쇄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난 여행자가 아니라 가이드가 되어 있었지만 지 좋아하는 걸... 누굴 탓하랴. 그렇게 4명에게 배포할 가이드북을 마스터 인쇄해서 나눠주고 그리운 페루로 향했다.  

왜 제목을 ‘Secret Peru’로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술자리에서 이 여행의 타이틀을 그리하자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삶에 비밀처럼 기억될 좋은 추억으로? 주위 사람들 몰래 후딱 다녀오자고? 뭐 여러 뜻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가이드북 'Secret Peru'

다시 쿠스코(Cusco)


뉴욕을 경유하고 리마에 도착하자마자 쿠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무조건 쿠스코를 먼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6년 전 이곳을 떠날 때 남겨놓은 그리움을 빨리 만나기 위해…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일행 중 2명이 어지럼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기대와 달리 이 여행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약국을 찾아 소로체(고산병 약)을 사서 먹이고 중앙광장의 대성당부터 천천히 만나기 시작했다. 환자들을 이끌고 쿠스코 주변 투어를 대충 끝낸 후 마추픽추와 성스러운 계곡 투어 예약을 위해 광장의 여행사를 찾았고 손짓 발짓으로 기차와 투어버스, 입장권 등을 예매했다. 그러고 나니 적응을 한 건지, 숙제 마친 고삐리 같은 마음이었는지 컨디션들이 살아나고... 광장 변 전망 좋은 카페에서 피스코 사우어(Pisco Sour. 독주 피스코를 섞어 만든 칵테일)를 종류별로 시켜 마시기도 하고, 고풍스러운 광장에 생뚱맞게 위치해있는 맥도널드가 신기하다고 배부른데 햄버거도 사 먹고, 우리나라에선 귀하다며 알파카 옷들 찾아다니고… 일행들 각각의 취향과 욕구가 분출되면서 오자마자 여행 마지막 날처럼 먹고 마시고 쇼핑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며 짐을 줄이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지만 이번 여행은 촬영이나 일을 해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한참 취미로 즐기던 스틸 카메라를 풀세트로 챙겨갔다. 그런데 여분의 메모리 카드 준비하는 걸 깜박하는 바람에 여행 전반부에 찍은 사진을 가져간 노트북에 옮겨 담고 메모리를 포맷한 후 여행 후반부를 찍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노트북을 부치는 짐에 넣었다. 경유지 뉴욕에서 뜯겨 있는 캐리어를 받았고 노트북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노트북은 아깝지 않은데 정성 들여 담은 나의 시선들을 함께 도난당했다. ㅠ  평생을 걸쳐 가장 미련이 남는 가장 아까운 분실물이다. 그래서... 밑의 쿠스코-푸노의 사진들은 내 휴대폰 카메라와 일행들의 사진이다.
쿠스코 중앙광장
쿠스코 골목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성당들
피스코 사우어(左). 광장 여행사에서 흥정 중(右).
마추픽추로 향하는 기차

새벽부터 서둘러 기차와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에 올랐다. 그대로여도 좋았을 곳이지만 고맙게도 6년 전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도착할 즈음 비가 추적추적 내려 살짝 섭섭했는데 순식간에 구름이 산 아래로 내려가 쨍한 풍경을 만들어주다가 다시 구름들이 CG처럼 산 아래로부터 몰려들며 장엄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한참 변화무쌍한 자연의 퍼포먼스를 넋 놓고 감상했다.  

마추픽추(Machu Picchu)
여행을 다니며 만난 한국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사람과 친해지는데 어벤져스급 능력을 가진 친구 덕분이다. 파라과이 대사관에 근무하는 준호, 그림 부부와 함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마추픽추를 만난 후 성스러운 계곡 투어에 나섰다. 우루밤바 강을 끼고 위치한 다양한 잉카의 유적과 자연, 전설을 만나는 흥미로운 투어로 일행들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수많은 시간 동안 누적된 이야기를 종일 만끽했다. 오얀따이땀보(Ollantay Tambo) - 살리네라스(Salineras) - 모라이(Moray) - 친체로(Cinchero) - 피삭(Pisaq)으로 이어지는 투어를 마친 후 쿠스코로 돌아왔다. 그중 다시 방문한 친체로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고즈넉함을 선사해주었고 6년 전 가이드를 해줬던 난시의 집에 가보고 싶었으나 투어 일행들과 함께여서 지척에 두고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얀따이땀보(Ollantay Tambo)
친체로(Cinchero)

푸노(Puno), 티티카카(Titicaca)


다음 행선지는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설렘이 있었던 푸노와 티티카카 호수. 그렇지만 2,500m에서 힘들어하던 일행들이 해발 4,000m의 푸노 지역에서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기우가 아니었다. 도착한 푸노의 호텔에서 반층의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하는 일행 둘을 방에 던져놓은 채 시내로 나섰다. 나도 피곤한 기운이 가득했지만 쉴 수 없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축제인 ‘촛불의 성모제(Fiesta de la Virgen de Candelaria)’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매년 2월 2일은 어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사건을 기억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있고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상징인 초를 축성하는 날이기도 하다. 가톨릭의 축일과 남미 각지의 여러 전승들이 혼합된 '촛불의 성모 축제'가 2월 2일 전후로 여러 지역에서 성대하게 열리고 푸노는 그 대표 도시중 하나다. 축제 문화가 발달한 라틴지역을 여행하며 일행들에게 축제 하나는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일정을 이렇게 짰다. 그러나... 누워있던 두 명의 기억엔 없는 배려가 되고 말았다.


오늘은 푸노의 큰 축제인 ‘촛불의 성모제’가 열렸습니다.
원래 2월 2일은 가톨릭에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친 걸 기념하기 위해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초를 축성하는 날이지요.
여기는 그것에 성모 마리아 신심을 더해 촛불의 성모 축일로 지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랑하는 우리 아들 주헌이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주헌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주님 봉헌 축일’에 있죠.
내 자식만큼은 세례명으로 이름을 안 지으려고 기를 썼는데 멀리 못 간 게죠. ㅋ
그나마 주봉, 님봉이 아닌 게 다행입니다.
- 아들 생일에 지 좋자고 여행 중인 아빠의 일기 [2011. 2. 2. 페이스북]
푸노 중앙광장과 대성당
촛불의 성모제
감자, 옥수수 등을 파는 좌판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 티티카카(Lago Titicaca. 해발 3,810m). 안데스 산맥은 두 지각판이 부딪치며 융기한 것인데 바닷물을 담은 부분이 4km 가까이 들어 올려져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염분이 남아있다는 신기한 담수호. 더 신기한 건 이 호수엔 갈대를 엮어 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갈대로 집을 지어 물 위에 떠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로스 섬(Isla Uros)으로 불리는 떠있는 갈대 묶음에 내려 이들의 생활방식과 공연 등을 접했다. 태양광 발전기로 전기를 쓰고 호수를 화장실로 이용하며 물밑 갈대가 썩으면 위부터 갈대를 엮어서 섬의 두께를 계속 유지해 살아간다고 한다. 어디서나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며 느끼는 건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 그때, 그곳에서 자연이 주는 대로 방법을 찾아 삶을 영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호수 중간의 육지섬인 타길레(Isla Taquili)에서 쏟아지는 별이 호수에 반영되는 것이 환상적이라는 밤을 보러 갈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빡빡한 후속 일정 때문에 발길을 돌려 푸노로 돌아왔다. 시간을 아껴 돌아온 푸노는 기름값 인상에 항의해 전면 파업 중이었고, 어떤 차량의 운행도 허하지 않는 강력한 파업으로 푸노에 발이 묶여야 했다. 아… 타길레 ㅠㅠ 사람들이 타길레가는 배를 많이 타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타길레, 타길래 ㅠㅠ

티티카카 호수(좌), 우로스섬(우)
우로스섬 투어에서 친해진 전남대 교수님 일행. 식사도 함께하고 귀국한 후에도 오랜 시간 연락하며 지냈다.

아레키파(Arequipa)


푸노를 겨우 탈출하여 도착한 다음 여정은 아레키파. 페루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스페인풍의 건물과 거리가 인상적인 곳이다. 페루 여행자들이 그렇게 많이 거쳐가는 곳은 아니지만 조용히 머물며 색다른 느낌의 여행을 하기 좋은 곳이다. 잉카의 상징 중 하나인 콘도르를 만날 수 있는 콜카 캐년(Colca Canyon) 투어를 할 때 거점이 되는 도시로 우리는 시간 관계상 도시를 둘러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소박하게 기대 없이 찾아간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Catalina)은 모든 아쉬움을 위로하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고 지친 여행의 피로를 푸는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다. 넓은 수도원 구내에 각자 흩어져 피정 같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고 난 카메라를 내려놓고 편히 머물려고 하다가도 모퉁이마다 구석마다 불쑥 나타나는 색다른 모습에 연신 셔터를 눌러댈 수밖에 없었다.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 방문은 최고의 선택이었고 ‘졸팅에 킹카’의 예로 언제나 떠오르는 기억이다.

아레키파 대성당
아레키파 중앙광장의 카페

이하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의 이모저모(여기부터가 남아있는 나의 DSLR 사진 ㅠ)

입구에 쓰여 있는 ‘정숙’. 설명도 쉬고 눈으로만 만나자.


리마(Lima), 이카(Ica), 바에스타스섬(Isla Ballestas)


일행 중 항공사 기장이 갑자기 한국으로 소환됐다. 세금만 내는 거의 공짜표로 전 세계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는 대신 비행 스케줄이 생기면 갑자기 불려 들어가야 하는, 부럽기도 아니기도 한 직업이다. 원래 아레키파에서 이카로 넘어가는 일정이었으나 일행 모두 의리로 급히 국내선을 타고 리마로 넘어왔다. 기장의 귀국 편 예약이 컨펌되는 동안 리마 도심에 나가 아까운 시간을 충실히 채웠다. 시내 공원은 젊은이들로 넘쳐났고 라틴의 정열과 활기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리마 분수공원(Circuito Magico Del Agua)

다음 날 공항에서 배웅하고 다시 이카로 향했다. 이전 페루 관련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페루가 여행지로 좋은 이유는 오랜 전통과 역사, 유적과 함께 정글, 고산지, 사막 등 다양한 기후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오는 구름이 안데스 산맥을 넘지 못해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밀림이 형성되어 있고 서쪽의 태평양 연안은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지대다. 그중 나스카와 이카가 관광지로 유명한데, 이카의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곳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소담스러운 오아시스 마을과 버기 투어(Buggy Tour)로 유명한 곳이다. 버기카를 타고 단단한 모래 능선을 스릴 넘치게 질주한 후 가장 높은 모래톱에 올라 샌드보드를 즐기며 가슴 탁 트이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그 위로 떨어지는 석양이 콜라보로 자아내는 환상적인 풍경에 어두워질 때까지 푹 젖어 있었다.

이카의 사막과 와카치나 오아시스
버기카
샌드 보딩
사막의 석양

다음 날 리마 방향으로 향하는 중에 피스코에 들러 바예스타스섬을 돌아보는 보트 투어를 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갈라파고스'로 불리는 바예스타스는 다양한 생물 종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갈라파고스와 같지만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들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투어 보트가 인원을 다 채우자 물살을 가르며 신나게 출발한다. 30분 정도를 달려 다양한 새들과 펭귄, 물개, 바다사자 등의 천국에 도착해 모터를 끄고 조용조용 섬 주위를 돌며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만났다. 유독 이곳에 얘들이 몰리는 이유는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페루 앞바다는 적도 부근임에도 차가운 해수가 올라오는 라니냐 현상의 영향으로 영양이 풍부하고 남극 펭귄과 바다사자까지 올라와 살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새들과 사람이 가까이 와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바다 생물들을 만나며 그들이 구경거리인지 우리가 구경거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Epilogue


예상치 못한 일들과 일행들의 건강 문제로 순조롭진 못했지만 리마로 돌아와 천천히 정리해보니 알찬 여행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짧은 경험과 검색만으로 어설프게 짜서 간 일정을 큰 사고 없이 소화했고 우연한 방문지가 우릴 흥분시키기도 했으며 친절한 페루 사람들과 반가운 한국 관광객들을 만나며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진 데이터를 도난당하는 가슴 아린 아픔도 있었으나 꼭 다시 와서 더 잘 찍어보라는 페루의 초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 코스로 시베리아 같은 경유지 뉴욕에서 2박 하며 마치 미국 동부 여행객 마냥 외모와 폼새를 세탁한 후 귀국했다.   

 리마의 해안 쇼핑센터 라르코마르(Larcomar)
리마 구시가의 성프란치스코 수도원
리마 중앙광장
뉴욕(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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