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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lon easy Sep 05. 2021

라인강에서 마주한 너

Köln_ Düsseldorf_Germany_2005

2005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특별기획 ‘믿음의 노래’의 마지막 여정지 독일. 이전 3달 동안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유럽을, 우리 팀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를 돌았고 마지막 편 제작을 위해 두 PD만 카메라를 들고 같이 독일로 향했다. 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이 모이는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담기 위해서였다. 독일 쾰른에서 5일간 열리는 본대회와 사전 일주일 정도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과 홈스테이에 120만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가는 곳마다 대회 공식 마크가 새겨진 옷, 가방, 스카프를 착용한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국적, 언어, 피부색에 상관없이 서로 안아주고 친교 하며 하나임을 확인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시민들도 거리, 상점, 식당 등 곳곳에서 일상을 방해하는 텐션 높은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편의를 제공하며 성의껏 대접했다.

버스에서건 길 위에서건 모두에게 열정적으로 인사하고 노래 부르는 시끌벅적 이탈리안들, 삼삼오오 모이면 몸을 흔들고 기쁨을 표현하는 라틴아메리카 젊은이들, 한발 뒤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그 모든 걸 함께하는 아시아 청년들… 하나하나 너무 예쁜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하나의 연결끈을 따라온 각양각색의 삶이 한 공간에서 기쁘게 나눠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과 같은 팬데믹의 상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상을 얼마나 건조하게 만들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2005년 독일에서 마주한 생경한 모습들을 통해, 결국 사람들 사이의 애정 어린 기운이 모두를 미소 짓게 하고 마음에 온기를 지피며 세상을 사랑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강력하게 나대는 냉소와 이기, 부조리와 폭력 속에서도 이렇게 서로를 선한 존재로 확인해주는 각자의, 집단의 경험들 때문에 유지되는 게 아닐까…   

대회가 열리는 쾰른, 도르트문트 등의 대중교통은 WYD 참가자들에게는 무료다.
브라질 출장때 가이드였던 동갑 친구 아스트로마도 브라질 청년들과 참가했고 브라질 프로그램에 일부러 찾아가 만났다. 한달만의 짧은 재회였지만 무척 반가웠다. 뒤에 둥가가 공연중이다.
우측이 쾰른대성당(Dom). 강건너에서 찍어야 전체를 한 앵글에 담을 수 있다.강변은 교황 베네딕도 16세를 기다리는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자리를 마련해준 수녀님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강 건너 전경과 모여드는 청년들을 담느라 정작 교황님이 도착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는 선착장에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날 밤부터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청년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스 명찰을 걸고 있어도 물리적으로 진입 자체가 어려웠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한국인 수녀님 한분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와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선착장으로 끌고 가주었다. 주변에서 높은 톤으로 들려오는 원성들을 무시하면서… 아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의 욕들이었을 거다. 못 알아듣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끌리는 대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강변 선착장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의 자리로 안내되었고 강변 난간 바로 앞자리를 양보받았다. 수녀님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으로 프랑스 샬트르 본원에 살고 계셨고 그곳 신자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 중이었던 것이다. 전날 오후부터 자리를 잡았고 촬영하는 우리를 발견하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셨다고 했다. 출장 내내 만났던 여러 기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어려움에 닥친 순간, 신기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수많은 경험들 앞에 겸손해졌고 누군가 날 돕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감독 없이 촬영에 집중하느라 오며가며 남겨뒀던 몇 안되는 장면들… 순간이지만 일하는 틈틈이 감상적이게 하는 많은 풍경들이 있었던 것 같다.
프레스센터. 너무 다녀서 지칠 때면 프레스센터를 찾아 쾌적하게 쉬기도 한다. 옆자리의 저분… 욕하는 건 아니었겠지…?
대회의 마지막 행사,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함께하는 폐막미사가 열리는 마리엔펠트. 전야행사부터 참석하기 위해 100만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이렇게 1박 2일을 보냈다.

대회 전체를 취재하러 온 우리 팀과 별도로 한국 청년들과 함께 온 취재팀들도 있었다. 폐막미사 후, 그들을 쾰른 시내로 불러 밥을 샀다. 체육관 바닥에서 자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몸 고생, 맘 고생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맥주와 스테이크로 위로했다. 짧은 몇 시간이었지만 이역만리에서의 수고 중에 나눈 친교였고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기억이 됐다. 마지막까지 남아 맥주 한잔을 더 기울인 춘감독을 어둑한 기차역에서 배웅한 애틋한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국순례단 취재팀

불쑥 나를 만나다


대회가 끝나고 하루 반의 시간이 남았다. 싼 비행 편을 찾다 보니 전 세계 순례팀들이 예약한 후의 남은 티켓을 구매했고 그 덕에 혼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일주일 간 누적된 피로로 몸은 무거웠고 숙소에서 쉬다가 떠날까 생각도 했지만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거리로 나섰다. 촬영장비는 숙소에 두고 여행자 모드로...

그렇게 나선 도시와 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만났던 모습과 속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지나가고 세상은 여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안에서 난 있는 듯 없는 듯한 이방인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난 3개월 간의 출장을 통틀어 처음 일이 없는, 혼자인 하루를 즐기러 가는 중이다.
일단 쾰른 Messe에서 기차를 타고 Soligen역으로 가서 신피디가 잃어버린 수첩을 찾고 쾰른으로 돌아와 혼자 둘러볼 예정이다.
일정 동안 엄청난 인파 때문에 보지 못한 Dom(쾰른대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고…

거리엔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관광을 하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반갑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 때문이리라.
그들의 얼굴에서도 여유로움이 읽혀진다.
즐겁다.    

[2005. 8. 23. 메모]
소실점에서 오고 소실점으로 향하는 기차들…
그곳에 있을 다른 세계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배고프면 먹고, 가고 싶으면 가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너무 나를 여러 계획들 속에 가두지 않았나 싶다.

[2005. 8. 23. 메모]
Dom

겉의 위용만으로도 심장을 순간 정지시키는 쾰른대성당.
그 안의 모습은 여느 유럽 도시의 성당들처럼 관광 코스에 불과한 것 같다.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그나마 군데군데 구석에서 기도하는 몇몇 사람들로 인해 본래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2005. 8. 23. 메모]
강변 식당에서 그냥 스테이크를 시켰을뿐인데, 냄비에 3인분은 될듯한 음식이 나왔다.
Rein

라인강변 카페에 혼자 앉아있다.
요기도 할 겸, 피곤한 다리도 쉴 겸…
필요한 말 이외에 침묵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나의 정서를 살찌우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쌀쌀한 강바람도 상쾌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dmc 42로 걸어 다닌다.

[2005. 8. 23. 메모]
Benedict 16

교황님이 쾰른에 처음 도착한, 불과 5m 거리에서 그분을 촬영한 선착장에 다시 왔다.
사람을 가깝게 본다는 것.
인연을 갖게 된다는 것.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대한 친숙함 때문인지 지금 교황님이 낯설기만 했는데…
지근거리에서 한번 본 후로 그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2005. 8. 23. 메모]


Köln HBF

어두워질 무렵, 모두 중앙역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아쉬움을 광장 위에 토해내고,
가져가는 만큼의 추억들을 남긴 채로…

[2005. 8. 23. 메모]
당시의 느낌과 감정이 글씨체에도 또박또박 남겨져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 준비한 후 필리핀, 아프리카, 중남미, 독일을 거쳤던 대장정의 마지막 시간을 혼자 여유 있게 보내며, 느릿느릿 나의 감각들을 세심하게 느끼다 보니 무척 센티해졌었나 보다. 강변 벤치에 앉아 갑자기 흘러내리는 감정들을 라인강 물줄기에 하염없이 흘려보냈다. 이런저런 감성적인 순간들을, 나의 익숙한 일상이 전혀 없는 곳에서 보내던 끝에 문득 홀로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매 순간 무척 애쓰며 괜찮아보려고 꾸역꾸역 살아온 내가 타자화되어 애틋하고 측은한 감정이 몽글몽글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모습을 마주한 나에게서 터진 눈물은 웅크리고 눈치 보던 내 안의 나에게 옮겨졌고 한동안 멈추지 않고 두뺨을 적셨다. 그러길 한참 후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의 강바람이 살며시 다가와서 천천히 말려주었다.   


부끄럽게도... 나 자신을 처음 정면으로 만났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과 느낌이 밑그림이 되어 이후 본격적으로 ‘나를 만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리운 쾰른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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