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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서재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기

지난 기억 그 해의 일기

by 홍재희 Hong Jaehee



지난 2월, 재개발 승인 허가가 떨어졌다. 반세기라는 시간을 묻어둔 집이 결국 헐리게 되었다. 우리 가족과 함께한 이 집이 드디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몇 억원이라는 집 값, 그 따위 돈으로는 도저히 환원할 수 없는 추억과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 사람과 더불어 태어나 살고 늙어간 삶과 살림의 공간인 '집'. 집이란 무릇 한 사람의 고향이며 역사이자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주택은 넘쳐나도 정작 '집'은 없다. '집' 없는 이 도시에는 마음 둘 데 없어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자들이 떠돈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그들처럼 '집'을 잃고 주택 따위를 전전하며 상실과 기억 속 이야기를 찾아 헤매게 될 터이다......


이상야릇하고 적이 슬픈 기분에 휩싸여 있는 데 어머니 왈, 이사 갈 때 가져갈 수 없으니 조만간 집에 들러 네 책을 전부 정리하렴. 그렇다. 아, 책. 빛바랜 책, 낡은 책, 그리고 절판된 책. 90년대부터 사 모았던, 나와 함께 했던 책들이 거기 다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책들을 다 어떻게 한담. 죄 싸서 집으로 옮겨다 놓아야 하나 헌책방에 죄 내다 팔까 아니면 기증을 할까. 어찌해야 할까.


책욕심이 많았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재를 몹시 갈구했다.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나만의 방을 마련한다면 필히 서재부터 만들고 말리라.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책장을 손수 짜서 나만의 장서를 빼곡히 채워 넣은 그런 방을.


아아, 그러나 지금은 그런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지금 사는 집에만도 책이 넘칠 지경이다. 내 딴에는 이 정도 양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했지만 이삿짐 일꾼들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삿짐을 싸러 올 때마다 다들 한 마디씩 불평을 늘어놓는다. 책이 왜 이리 많냐 책 무게가 제일 나간다 책 운반이 제일 힘들다 등등. 그러다 보니 이사를 갈 때마다 책은 천덕꾸러기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제 소유의 집, 죽을 때까지 살 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책을 사 모으는 것은, 수중에 책이 늘어난다는 것은 불편한 취미이자 과분한 사치가 된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는 책은 일단 사서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나 이제는 책을 되도록이면 사지 않는다. 대신 사고 싶은 책, 읽고 싶은 책을 마음에 품고 도서관으로 간다.


지금은 수 만권의 책을 다독하기보다 한 권의 책을 진심으로 음미하는 독서가가 되고 싶다. 한 권의 책을 일생을 거쳐 정독한다는 것. 물론 정독이란 본래 다독을 한 다음 도달하는 경지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 미친 듯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무식하게 우직하게 읽고 또 읽었다. 책 읽기란 누구나 이렇게 난독으로 시작하는 법이다. 이리저리 글을 파는 가운데 자기 본래의 기호를 알아가고 그렇게 해서 자신이 읽게 되는 책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 책 저 책을 탐독하는 이유는 아직 만나지 못한 한 권의 책을 진정으로 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한 권의 책을 찾아 아직도 수많은 책 사이로 난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인가.


만 권의 책이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방보다도 딱 한 두 권의 책이 책상 위에 놓인 간소한 방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좀처럼 쉽지 않고 오늘도 나는 도서관에서 책 일곱 권을 빌려 들고 낑낑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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