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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Jun 26. 2022

모두가 가진 우울의 현주소: 연극 <밤의 사막 너머>

국립극단 창작공감: 작가, 연극 <밤의 사막 너머> 리뷰

 올해 3월부터, 국립극단의 작품개발사업인 ‘창작공감: 작가, 연출’에서 탄생된 작품들의 발표가 있었다. 3월 9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 신해연 작, 동이향 연출의 <밤의 사막 너머>는 그 중 극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창작공감: 작가’ 프로그램에서 개발된 작품이다. 창작 ‘공감’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눈에 띈다. 한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공감’의 의미는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 이다. <밤의 사막 너머>는 그러한 공감의 의미 중 ‘알고 이해’의 측면을 뒤로 제쳐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상을 '안다'는 의미는 개연성 있는 서사 아래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내 안에 정의내릴 수 있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하지만 <밤의 사막 너머>의 전반에 가득한 은유와 상징, 파편화는 인물과 상황의 명확성과 구체성을 의도적으로 감춤으로써, 관객이 무대 위 상황들을 자신이 명백히 정의내린 한 타자의 이야기로만 치부하지 않게 한다. 작품은 관객이 파편화된 장면들을 감각하고 지각하면서, 매 순간 자신의 역사 속에 있던, 자신 또는 타인의 입체적인 우울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의 우울들이 자신의 안에도 있었다는 ‘앎’은 어떤 정서적인 작용에 뒤이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더 다양한 개개인들이 작품에 ‘공감’하게 만든다. 모호함 속에 어떤 특정 인물도 부를 것 같지 않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는 극이 진행되며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노래’ 가 되고, 원숭이 보리의 탈이 여자에게 넘어오고 다시 무대에 남아 객석을 마주하며 이를 쓸 사람을 기다리듯이. 작품은 모두의 이야기가 될 확장성을 갖는다. 이는 현대인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기에 그만큼 다양한 양상을 가진 ‘우울’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본다.  


연극 <밤의 사막 너머> 컨셉 이미지

   

불확실 속 인물과 불확실 속 관객

 극 중 여자와, 모텔의 부부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지만, 유효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불확실한 상황 속을 끝없이 헤맨다. 여자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덤 같은 방에서 벗어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내기 위해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부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부 중 남자는 죽음과 가까운 상태로 누워있기만 하고, 여자는 어디도 집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한참을 걷는다. 부부는 살아있다는 것이 코 밑에 손을 댔을 때와 같이 ‘축축하고 기분 나쁜’ 일임을 느낀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부는,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세상 속,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편지’인 모텔 전단지라도 붙잡고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생각해내려고 한다. 

 여자는 부고편지를 받고 그 편지의 주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옛 친구 보리를 찾기 위해 의문투성이의 여정을 떠난다. 부부 역시, 결국 모텔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가 왜 사람일 수 없는지, 자신들과 아이가 사람일 수 있는 곳은 어디 있는지를,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찾아 떠난다. 인물들의 행보는 어디에서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끝없이 어딘가를 헤매는 과정이다. 이는 극을 보는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품은 인물들이 처한 정답 없는 불확실성과,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파편화된 형식 속에서 관객이 느끼는 불확실성을 연결 짓는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의 매 순간을 감각하며 극 중의 이야기가 자신에게도 끝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느끼도록 한다.

 이와 더불어 작품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인물과 대사 구성이 다소 시적이고 은유적인 중에, ‘사회상’과 ‘감각’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명확하게 와 닿도록 제시된다는 것이다. 각 인물이 쌓아올린 서사는 은유적이고 모호할지라도, 우선 사이버가수 아담과 같이 극장 안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을만한 대중문화 속 인물들, ‘노 키즈 존’과 같은 현재의 이슈들이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다. 또한, 작품에는 인물들이 현실을 잊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양상, 인터넷 상에서 타인의 관심에 집착하고,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사회가 말하는 기준에 들지 못하면 지워진다, 또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의 일을 대신할 존재가 생겼고, ‘요령 없이’ 일만 하는 존재는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다’ 등의 언급도 등장한다. 이와 같이 현실적이고 뼈아픈 사회 단면에 대한 묘사는, 매끈한 화면 너머 디지털 세계에 갇힌 사람의 모습, 동물의 탈을 쓴 인간의 모습 직설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같은 작품 속 이야기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한눈에 인지하게 함으로써 객석과 무대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또한, 작품은 관객에게 빠르고 명확하게 닿는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소품이나 소재, 대사를 사용하고 있다. 무대 위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사방으로 걸어 다니는 배우들 속에 처음 등장하는 여자의 이미지에서,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군중 속에 혼자 걷는 ‘느낌과 정서’가 관객에게 곧바로 전달된다. 인물이 헉헉대며 달리는 모습에서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막막함과 답답함이 한 번에 와 닿는다. 광란의 파티를 즐기던 여성이 문득 파티가 온라인상에서 진행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연출도 인상깊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은 한 순간에 사그라들고, 어두운 방 안에 여자의 스마트폰만 빛나는 장면은, 가상세계에 점점 몰두하는 오늘날, 잊고 있었던 우울과 초라함이 순식간에 찾아오는 순간의 정서가 전달되게끔 한다. 특히나 모텔의 부부가 가진 물침대라는 소재와 이를 밟을 때마다 나는 물소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위태로움을 드러내는데, 이는 '드넓은 바다 위 떠다니는 물침대' 까지 넓은 공간으로 확장되며, 인물이 삶을 영위하며 느끼는 절망감과 불안감을 극장 전체에 극대화시킨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와 동시에 무대 뒤쪽 공간에 드러나는 배우들의 실시간 영상은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와는 달리 맥락 없이 확대되거나 소거되는 모습을 드러내며 온라인 시대에서 나의 상황과 고통이 타인의 시선 안에는 제대로 인지될 수 없다는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의 특징은, 불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인물 개개인의 서사와는 달리 빠르게 ‘감각’으로 와 닿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인물과 상황에 대한 모호함과, 이에 대비되게 빠르고 분명하게 와닿도록 제시되는 시대상과 정서 및 감각은, 작품 속 서사에 '알맞는' 관객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관객들이 작품 속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공감’해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생각한다.   

  

우울은 단일한 형태가 아니다

 앞서, 극이 형식적으로 많은 관객들과의 공감을 꾀했던 것을 살펴보았다면, 내용상으로도 그러한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작품은 ‘우울’이라는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굉장히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를 단일한 형태로 정의하지 않으려 하는 듯 보인다. 극의 후반부에 우울의 의인화된 캐릭터가 맡게 되는 극 중 서술들은 그전까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녹음된 음성으로 제공된다. 뒤늦게서야 단일한, 우울의 의인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우울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미리 제공해 자칫 단일한 형태 또는 개념으로 제시하며 극을 이끌어가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 인물이 드러내는 우울의 양상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드러나는데, 인물들의 행동은 ‘우울을 겪는 인물’의 스테레오타입을 고수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 우울하게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인물 옆에서는, 그 죽음과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체적으로 숨차게 벗어나려 달리는 인물이 제시된다. 우울이라는 것은 이처럼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양상으로만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특정 인물만이 우울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잘 드러난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우울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부러워한다. 리더와 기사는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마저도 사회가 제시한 다수의 기준 또는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굳어져버리는 것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관계 속에서 자신이 소외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매일같이 테스트를 받는 기분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이 집약된 이미지인 스크린 속의 기사는, 스크린 밖에 자유로이 있을 수 있는 읽혀지지 않은 데이터이자 오류, 여자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읽히지 않는 데이터가 된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없는 존재로 취급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존재인 여자는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우울과 고충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향한 기사의 부러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불어, 공연은 특정 개인의 우울을 구성하는 요인이 그 자신에게만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작품은 인물들이 비참함을 말하는 장면에서도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웃을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지점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원숭이 보리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시연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보리는 우울과 고통에 몇 번이고 죽음을 보여주지만, 그 죽음은 너무 극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또는 ‘죽음 같지 않은’ 죽음이라는 이유 등으로 그를 지켜보는 타인에게 닿지 못한다. 보리의 죽음 시도는 인물의 정서가 가진 무게와는 다르게 코믹하게 그려짐으로써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곧 인물의 죽음을 시도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동시에 인지하게 된다. 무대 위 보리가 느꼈을 비참함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이 무대 위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며, 타인의 우울을 심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고찰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무대 위의 우울은 한 가지 명확한 방향으로 읽혀질 수 없는 데이터이다. 오히려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읽혀지지 않는 데이터’로서의 소외감을 느끼는 더 다양한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극장이라는 밤의 사막에서

 극의 마지막 부분, 결국에 여자는 사막으로 떠난다. 우울은 함께 가는 건 여기까지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길도 알 수 없는 사막의 한가운데, 여자는 어지러운 인간관계와, 그로부터 제시받던 인간으로서의 조건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여자가 떠나오던 길, 사람들에게 각광받던 ‘리더’, 매일 매일이 테스트 같다는 ‘리더’와 같은 형상을 한 사람이 곰 사람이 되어 있다. 단군 신화를 생각해보면, 곰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동굴 속에서 홀로 긴 테스트를 견딘다. 하지만 곰 사람은 불안하고 외로운 나날 속에서 혼자 온전한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오히려 자신을 인간관계의 ‘테스트’ 속으로 몰아넣어 왔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인간성과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는 사람의 형상에서 멀어진, 야만성을 가진 곰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앞서 사람들이 온라인 파티를 통해 현실에서 마취되던 모습에서 보여졌 듯, 곰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근본적으로 피하는 것이 아닌 술로 ‘마취’되는 것을 택한다. 곰의 집을 지나 사막으로 가는 여자와는 상반되는 행보이다.

 문득 사막의 모습이 극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관객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계를 벗어난다. 그렇게 오롯이 혼자가 되어 작품과 ‘공감’하며, 자신 내면에 가려졌던 감정과 경험들을 만나며 나를 들여다본다. 그렇게 처음 마주한 나 자신은, 우울의 말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얼마나 걸어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관객은, 사막 위에 서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연극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명쾌한 방향이나 정답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연극이 올라가는 이 시대에,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만연한 우울을 해소할 정석적인 방법은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우울의 상황이 계속 진행 중인 것이 현실이다. 사막에 서 보았 경험을 바탕으로 관객은 스스로 극장 밖의 현실을 걸어나가야 한다. 작품은 이처럼,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결말에서도 관객들에게 하나의 정답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최대한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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