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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란 Jul 10. 2021

<Her> : 주체와 사랑할 용기

당신은 진정한 주체와 마주하고 계신가요?

사랑에 지친 이들은 자주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곤 한다. 그들의 다짐에는 사랑했던 이와의 갈등에 지치는 마음, 흔히 '감정 소모'라고 말하는 버거운 마음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며 왜 이런 갈등들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곤 하는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나와 같지 않은, 나에게 완벽하게 맞춰지지 않은, 나와는 또 다른 '주체'이기 때문이다. 


주체와의 사랑에 버거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주체와의 사랑을 피하고 객체를 대상으로 한 사랑을 지향함으로써 보다 수월한 길을 걸으려 하는 이들도 있다. 나에게 완벽히 맞춰줄 상대방(사람)을 돈이나 힘으로 구하고 부리는 이들이 그러하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이 아닌 객체(AI)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알파고, 그리고 최근 문제시되었던 '이루다 챗봇'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사실 수년 전부터 객체와의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인간의 노력들은 만연했다. 십몇 년 전에도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플 '심심이' (현재는 카카오톡에서 운영 중)가 유행이었다. 외국에도 '죠지와 대화하기' 등의 서비스가 인기다. 이와 같은 챗봇들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도록 유도하기'이다. 


오늘 가져온 영화 <her>의 주인공 테오도르도 그런 사람이다. 테오도르는 컴퓨터 시스템 사만다를 만나기 전부터 항상 객체적인 대상과의 사랑을 꿈꿔왔다. 이 영화는 그런 테오도르의 일련의 성장 서사를 통해 주체와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언명한다. AI와의 사랑의 실패를 그렸다는 점 때문에 자칫 <her>은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의 대립 구도를 통해 '가짜' 인간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영화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her>은 진짜와 가짜의 대립 구도를 해체하고 주체와 객체라는 두 항을 설정하여 '주체와의 사랑'에 우월성을 부여하고 있다. 즉, AI와의 사랑은 가짜 인간과의 사랑이어서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가 AI를 통해 객체와의 사랑을 기대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춰진 대상, 자기를 중심으로 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I가 아니었더라도, 사만다가 진짜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객체를 기대했던 테오도르의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사랑 앞에서 타인을 위해 영원히 객체가 되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편지 작가 테오도르는 멋진 편지로 의뢰인의 마음을 대신하여 전한다. 의뢰인이 전해준 자그마한 진실 위에 두터운 거짓들을 덧대어 완성한 그 편지는 과연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진실된 이 세상을 기만하는 사이비 ‘가짜’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테어도르의 친구 에이미는 진실된 다큐멘터리를 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가 잠자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에이미의 남자 친구가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재연 배우를 고용하여 어머니의 꿈을 담으라 하니 에이미는 대답한다. “그러면 다큐멘터리가 아니잖아.” 거짓에 가까운 테오도르의 편지에는 많은 이들이 감동하고, 진실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는 에이미의 다큐멘터리는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짜인가, 가짜는 그 어떤 의미도 담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테어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가짜’여서, 진짜 인간이 아닌 가짜 인간 컴퓨터 시스템과의 사랑이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사만다와의 사랑이 주체(she)가 아닌 객체(her)와의 사랑이었다는 점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 난다. 테오도르가 구매한 인공지능 시스템 사만다는 홍보 문구 그대로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존재였다. 에이미가 자신의 os를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os는 사용자를 흑과 백으로 나눠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회색지대로 끌어들여 그들을 이해해주고 포용해준다. 테오도르는 os에게 모든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의 전처 캐서린은 온전한 가치체계를 가지고 판단하는 주체였기에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서로 맞춰가기보다 마냥 순종적이고 낙천적인 아내를 원했던 그에게 캐서린은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만다는 사용자 테오도르를 "위해" 존재했었다. 동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캐서린과 달리 사만다의 일은 테오도르를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만다는 많은 순간, 테오도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곤 한다. 테오도르의 셔츠 앞주머니에 들어오는 시야는 사만다가 보는 세상의 전부일 때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 기계 학습을 하는 인공 지능이지만, 학습의 토대는 테오도르가 주입한 데이터일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사만다는 ‘몸’을 가지지 못한다. 그로 인해 옆에 누울 수도, 테오도르를 안아줄 수도, 테오도르에게 안길 수도 없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코 테오도르에게 ‘부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테오도르에게 멀어질 수 있고 에이미의 애인은 묵언수행을 하러 절로 떠날 수 있지만 객체로서의 사만다는 결코 테오도르에게 부재할 수 없다.


캐서린과의 사랑에 지친 테오도르가 주체와의 깊은 관계를 두려워하는 모습은 영화 초반부 소개로 만난 여성과의 만남이 실패로 끝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주체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그에게 사만다가 찾아왔고, 그는 사만다에게 객체적 태도를 기대했다. 얼마간은 그 사랑이 유효했으나, 사만다가 큰 깨달음을 얻어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 그 사랑은 깨졌다. 더 이상 테오도르에게 온전히 맞춰줄 수 없고 테오도르의 것이면서 테오도르의 것이 아니게 된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기대한 객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객체로서 자신의 전부를 품어주리라는 기대가 깨진 이상,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체로 나아간 사만다는 비로소 테오도르에게 부재할 수 있게 된다.


객체와의 사랑을 기대한 테오도르가 주체로 나아간 사만다를 마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사만다가 os여서, 가짜여서 실패한 게 아닌 것이다. 대필 편지에 우리의 삶이 녹아있다며 크게 감동하는 많은 이들처럼, 사만다의 말과 마음에 인생이 바뀌었던 테오도르처럼, os 친구와의 우정에 위안을 얻는 에이미처럼, 가짜 또한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 가짜가 결코 진짜일 순 없지만 진짜를 표상하는 한,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가짜 마음이든 진짜 마음이든 다가오는 마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체적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만다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테오도르의 모습은 꽤나 아름답다. 거짓 편지만을 대필하던 테오도르가 마지막 장면에서 캐서린에게 진실된 마음을 진실된 편지로 전한다. 이는 그가 더 이상 가짜도, 객체적 대상도 아닌 ‘주체적인 진짜’와의 사랑을 할 용기를 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가끔 우리는 타인에게 나의 모습 그대로를 기대하곤 한다. 나에게 맞춰주길, 그리하여 갈등이 생기지 않길 바라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간헐적인 갈등은 오히려 나와 상대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지 않음을, 진실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나와 상대의 갈등은 상대가 나와의 관계에 온전히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객체와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 진정한 관계와 사랑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연역한다. 관계의 참여자 중 누군가가 상대방을 객체로 만들어버리거나, 혹은 스스로 관계에 있어 주체가 되길 포기하는 순간, 그 관계는 시한부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타인과 완벽히 같을 수 없다. 공통점을 늘려나가고 차이점을 줄여나가며 닮아갈 수는 있다 한들 결코 같아질 수는 없다. 따라서 타인과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저 회피하는 것은 그 관계를 포기하는 태도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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