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형적 시간 지각 ·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수행성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 (2016)와 이의 원작 소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에는 비선형적 시간 지각과 목적론적 사고방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소설과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해당 개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시사한다. 당신이 만약 당신 인생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중간 과정들을 전부 알고 있다면, 또한 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우리가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글에서 '비선형적 시간 지각'이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동시에 동등하게 사유할 수 있는 사고의 방식을 말한다. 이는 소설에서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으로 제시되며, 그들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알고 미래를 예측하지만, 그들은 현재 시점에서 현재를 사유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과거와 미래를 사유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를 전부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유의 힘은 동등하다. 비선형적 시간 지각의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목적론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과거와 미래가 위계 상 구분되지 않듯, 그들에게 원인과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의 원인이 아니고, 미래가 현재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저 처음과 끝이 있고 그 처음과 끝은 언제나 알고 있는 무언가 이며, 그 중간 과정은 끝이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지 않은 듯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우리 인생의 처음과 끝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에 태어났다는 처음과 머지않아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끝 말이다. (물론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고 반박할 수 있다.) 내일 비가 올 지 안 올지, 일 년 뒤 같은 날 저녁으로 어떤 메뉴를 먹을지는 당장 알 수 없더라도 내가 지금 저녁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를 한 시간 뒤를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목적론적 사유보단 인과론적 사유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대체 왜 우리는 시시한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수행하는가이다.)
가끔 우리는 예상 그대로 반복되는 하루 일과에 지루함을 느끼고 회의감에 우울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또 이미 알고 있는 내일을 살아가는가? 예상되지 않는 행운이나 원치 않는 불운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는 순간의 기쁨과 슬픔, 욕구의 충족과 불만 등을 느낄 수 있다.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우리는 그 감정들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끝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살아가는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작고 무거운 짐처럼 두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 의미에 대한 고민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컨택트>(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 의 내용을 검토해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끝을 알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헵타포드
이 단편은 주인공(에이미 아담스)이 딸에 대한 이야기와 주인공 자신이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워가는 이야기가 교차 서술되는 구성을 가졌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지구에 온 외계 문명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운다. 헵타포드는 방사상 대칭의 몸을 가진 외계 생명체이다. 그들의 몸에는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글자와 언어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몸만큼이나 인간의 것과는 철저하게 다른데, 이는 그들의 사고 과정 자체가 인간과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의 음성언어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 그들의 문자 또한 정해진 순서대로 쓰이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발화하거나 독해할 때,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거나 쓰는 것이 아니라 순서 없는 기호들의 결합이 하나의 그림처럼 쓰이고 읽힌다. 그들의 문장은 개개의 단어로 분해해서 재조립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문장은 단어로 분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구성한다. 회전시키고 수정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고방식은 상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언어가 그러하듯, 그들의 생각, 그들의 사고방식 또한 순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미 현재를 알고 있고, 미래를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알고 있듯 말이다. 그들은 그들 인생의 처음과 끝, 그리고 모든 중간과정들을 하나하나 전부 알고 있다. 그들 인생뿐 아니라 지구, 우주의 처음과 끝, 그리고 모든 중간 과정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시간 지각은 선형적이지 않고, 인과적이지 않다. 그들의 사고 또한 인과에 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고는 목적론적이다.
에이미 아담스
이런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운 주인공은, 사고 또한 헵타포드와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그녀 또한 헵타포드처럼, 목적론적이고 비인과적인 사고, 비선형적인 시간 지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 또한 자신 인생의 처음과 끝 그리고 모든 중간 과정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중간 과정 한 시점에 자신의 딸이 죽음을 맞게 되는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변화된 사고 형식은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와 번갈아 서술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 중간중간 그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네가 고등학교 2학년인 무렵의 대화를 기억해. 일요일 아침이고, 내가 스크램블 에그를 만드는 동안 너는 브런치 식탁에 식기를 차리고 있겠지. 어젯밤 갔던 파티 얘기를 내게 해주면 서 너는 웃고 있을 거야.”
위 문장들 속에 '차리고 있겠지', '웃고 있을 거야' 등에서 알 수 있듯 어떤 부분은 미래 시제로 서술되어 있지만, ‘기억해’라는 단어를 보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딸에 대한 서술에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시간이 겹쳐있는 것이다. 영화 <컨택트>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기억의 파편과도 같은 이미지들로 영화 곳곳에 흩뿌려지곤 한다. 소설 후반부에는 딸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소설 마지막 부분의 마지막 서술에는 딸의 탄생이 그려진다. 소설 속 뒤죽박죽인 이야기 진행은 현재 주인공이 딸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지만 딸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생의 순간순간을 기억(예측도, 상상도 아닌 기억이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이 요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저 과거와 현재를 알고 있듯 미래도 동일한 방식으로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하고 있다는 것, 즉 미래를 현재와 동등하게 사유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우리 인생의 관계성
헵타포드와의 이야기와 딸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 서술된다는 점, 그리고 딸에 대한 이야기에는 시간적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는 점은 이 소설을 흥미롭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전혀 무관한 이야기 (딸에 대한 특정 이야기와 헵타포드와의 특정 이야기)가 번갈아서 나오는 듯 하지만 연속적으로 교차 서술되는 그 일화들이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지점이다.
예컨대 헵타포드와의 교류 속에서 언어를 습득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초반에서는, 주로 딸의 언어 습득 과정을 담은 일화, 딸과 주고받았던 언어유희 농담, 딸과의 대화 등이 중간중간 삽입된다. 헵타포드의 문자가 인간의 것과 크게 달라 대화에 혼란을 겪은 사건이 서술된 직후에는 딸아이와의 대화에서 너무나도 다른 가치관에 놀랐던 일화가 삽입된다. 주인공은 딸과의 대화를 서술한 뒤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 이때의 ‘너’는 딸을 가리키고 있지만, 앞 뒤로 등장했던 헵타포드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예로, 헵타포드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그들에게 수학에 관한 질문을 해도 되겠냐는 동료의 질문에 주인공은 아직 아니다, 뭐든 시작하기 전에 그 전의 것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당 서술 직후에 삽입되는 딸과의 일화에서 딸은 하와이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당장 떠나고 싶다고 떼를 쓴다. 주인공은 말한다. “기다리는 게 좋을 때도 있어”
<네 인생의 이야기>의 이런 독특한 구성, 그리고 그 구성에서 돋보이는 일화 간의 유기적 관계성은 마치 헵타포드와의 사건들이 그들의 사고방식 및 시간 지각 방식이 그녀 혹은 그녀의 딸, 혹은 우리 모두의 인생과도 유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제목 또한 <네 인생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제목에서 지칭하는 ‘너’는 주인공의 딸이 될 수도, 독자가 될 수도, 인류 전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헵타포드의 언어가, 주인공의 언어 습득이, 그리고 이 소설 전체가 시사하는 바를 밝혀내야 한다. 헵타포드와의 교류에서 오는 가장 큰 깨달음을 짚어낸 다음, 그 깨달음과 우리의 인생이 맞닿는 지점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위에서 설명했듯,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순서가 없다. 그들의 문장은, 문장의 처음과 끝을 알고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설계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들의 사고 또한 그러하다. 처음부터 알고 있는 끝, 그리고 의미를 갖지 못하는 순서. 이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물리학의 변분 원리처럼, 그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목적론적이다. 전제와 결론이 동시적으로 호환된다.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은 이로써 동등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적론적 사고방식에서 ‘인과’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음에 현재를 알고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마구 뒤섞인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원인과 결과라는 순서, 이미 알고 있는 처음과 끝, 그리고 끊임없는 뒤섞임. 이는 주인공의 인생 그리고 딸에 대한 서술 그 자체이다. 시간 순으로 서술된다면 딸의 탄생 뒤에 헵타포드와의 사건, 그리고 딸의 죽음이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딸의 죽음 대신 다시 딸의 탄생이 서술된다. 이해가 되지 않아 시간 순으로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보려 노력할 때 즈음, 독자는 깨닫는다. 시간 순의 재구성은 어디까지나 ‘재구성’이며, 적어도 이 소설에서만큼은 철저히 무의미하다는 것을.
주인공은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웠고, 동시의 그들의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배웠다. 결코 그들만큼 능숙해질 순 없겠지만 본인의 인생을 목적론적으로 살고 있다. 그는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 딸의 탄생 또한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인 딸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으며,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사랑하였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과론적일 수도 목적론적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옳다고, 더 낫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다. 우리는 분명 태어났고, 죽을 것이다. 또한 이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가곤 한다. “어차피 죽을 것, 왜 태어났냐.”라는 말이 이제는 그리 잔인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끝을 알고 있기에, 죽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인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헵타포드의 어순이 자유롭듯, 어떤 구의 경우에도 별다른 우선순위가 존재하지 않듯, 또 문장 중간에 여러 층위의 구를 삽입하는 일에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듯, 우리는 자유롭게, 내 인생의 중간인 현재에 용기 있게 새로운 사건을 삽입할 수 있는 것이다. 내 한 발짝이 온 인생에 미칠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나는 그 무엇도 도전할 수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순간의 찬란함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비선형적인 이야기 전체가 은유하는 목적론적 인생관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