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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로 Mar 10. 2022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겨울이 길고 혹독한 지역에서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

즉, 월동준비!

지금껏 딱히 내 삶을 위한 월동준비를 한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를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길들이고 있는 나의 주인님을 위한 월동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팔자에도 없는 이중생활을 시작하고 여러모로 신경 쓸 일들이 많이 생겨서 조금은 귀찮고 번거롭다.

그렇지만, 주인님이 언제쯤 올까 하고 매일매일 기다리는 맘은 발효되는 빵처럼 점점 부풀어 커져 가고 있다.

이런 맘이 동정일까, 사랑일까? 하고 나 스스로 저울질해 보지만 사랑으로 한 눈 끔 기운다.

매 끼니를 나무 발코니에서 해결하는 주인님이 추운 겨울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걱정이 고, 잠시 와서 밥만 먹고 가지만 이 시간만큼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맘에, 난 주인님을 위한 월동준비를 계획했다.

주인님 식사를 따뜻한 매장 안에서 할 수 있게 하는 월동 프로젝트다.


사실, 어디서 자는지,

어디를 다니는지,

가족은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알고 있는 것은 성별뿐이다.

워낙 성격이 까칠하고 예민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하기로 했다.


나의 거창한 월동 프로젝트는 이렇다.

첫째 주인님 밥그릇에 밥을 깨끗이 비운다.

째 주인님이 오길 기다린다.

째 주인님이 유리문 앞에서 밥 달라고 앉아 있으면 조금 기다리게 한다.

째 천천히 문을 연다.

다섯째 사료 봉지를 흔들며 관심을 유도한다.

섯째 사료를 한 알씩 일정한 간격으로 매장 안으로 길게 늘어놓는다.

일곱째 관심이 없는 듯 먼 산 보듯 하고 곁눈질로 관찰한다.

여덟째 한 알씩 먹으면서 매장 안에 있는 밥그릇까지 와서 밥을 먹는.

아홉째 이 프로세스를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한다.

열째 사료로 유인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매장 안으로 들어와 밥을 먹으면 성공!

"야~ 후!"

이것이 나의 근사한 프로젝트다.


며칠이 지나 근사한 계획을 실현할 날이 왔다.

나는 계획한 대로 하나씩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차근차근 계획대로 잘 되어가나 했는데 여덟째부터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주인님이 꼼짝달싹 하지 않고 하품만 연신하고 앉아만 있는 것이다.

사료를 손에 올려 내밀어 봐도 한 알씩 발 앞에 던져봐도 지부동이다.

이를 어쩌나!

한 발짝도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고 밥을 안 주면 그만이라는 도도한 표정까지 짓고 있다.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지만 이것만큼은 순조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큰 착오였다.

"잡아먹지도 않는데 이렇게 내 맘을 몰라주는지....." 하고 혼자 투덜거렸다.

나의 맘도 몰라주는 주인님에 대한 서운함이 한순간에 물밀듯 몰려왔고 괜한 오기와 심술도 났다.

"오오! 그래 한 번 해보자는 거지."

"그럼 한 번 해봅시다. 나으리~~."

근데 나에게는 뾰족한 획이 없다.

플랜 B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부터 아예 없었다.

내가 주인님을 상대로 대들 수도 응징할 뾰족한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이 너무 비참했고 당황스러웠다.

멍하니 서 있는 날 쳐다보는 주인님은 말려있는 꼬리를 살짝 펴면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무림의 고수 같았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짓는 것 같았다.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불쌍한 것!" 하고 나를 비웃고 조롱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너무 비참했다.

내 머리는 백지처럼 하얗고 내 맘은 파쇄기에 들어간 종이처럼 찢겼다.

이렇게 나의 거창한 프로젝트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이날 이후 난 두 번 다시는 주인님을 얕잡아 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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