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로 Jun 07. 2023

김치찌개

어제저녁에 아내가 끓여 놓은 김치찌개다.

아내는 손이 크다.

솥뚜껑 만한 냄비에 찌개를 가득 끓여 놓는다.

하루종일 찌개만 먹어도 이틀은 더 먹을 만큼이다.

난 뚜껑을 조심히 열어 본다.

오늘은 어떤 조합인지 궁금도하고 포식자의 음흉함을 감춘 아량 은 눈 맞춤이기도 하다.

실은 살코기 두둑한 놈인지 비계 두둑한 놈 인지 어떤 놈부터 골라 먹을 건지 오늘은 어떤 조합으로 내 식탐에 길들여진 늘어진 위장을 채울지 염탐하는 것이다.

나만의 성대한 만찬을 위한 주술적 의식이랄까.

아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사바나 건기 같은 텅 빈 위장을 채울 조급한 허기 때문이다.

요란한 나만의 의식을 성대히 치르고 커다란 냄비를 가스 불 위조심히 올린다.

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따분하고 지겨워서 내 맘이 먼저 끓어 된다.

아무리 급해도 최상의 맛을 위한 요소를 - 음식의 온도와 재료의 식감등 - 충족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난 얌전히 이 진리에 순응하기로 한다.

난 찌개가 끓길 기다리며 하루키의 책을 뽑아 소파에 앉는다.

작가 소개와 목차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의 세 페이지 중간쯤 읽어 내려갈 때쯤 찌개끓기 시작한다.

보글보글 어린 아기의 숨소리 같다.

맞물려 덮은 뚜껑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온 악마의 냄새가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다.

돼지고기 비계와 어우러진 잘 삭은 김치 냄새가 온 집안을 서서히 잠식한다.

찌개 냄새는 후각세포를 지나 곧바로 측두엽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가 된다.

"그 느낌 아니까!"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나의 세포들은 파블로프의 개가 된다.

입에 침이 고이고 텅 빈 위장은 메마른 하늘의 천둥처럼 울어 된다.

냄비 속에서 끓어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끓어대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섭다.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같다.

그 소리가 내 뱃속에서 나는 소리랑 별단 다르지 않다.

나는 기다린다.

최적의 맛을 위해 약간의 인내심이 더 필요하다.

"하니, 둘....."

"셋."

"지금이다."

나는 책을 덮고 얼른 뛰어가서 불을 껐다.

맛있는 국물의 온도와 재료의 식감을 위해 빛 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식탁 위에 냄비받침을 놓고 찌개를 조심히 올려놓는다.

투명한 냄비 뚜껑으로 보이는 냄비 속은 용암이 끓어오르듯 한다.

뚜껑을 열면 활화산이 폭발하듯 연기와 냄새가 쏟아 올라온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소리는 텅 빈 내 뱃속에서 기생하는 굶주린 괴물들의 아우성과 같다.

나는 조급해진다.

뭐부터 해야 할지 허둥된다.

"침착, 침착해야지. 천천히 천천히..."라고 머리는 말하지만, 몸은 벌써 훈련이 잘된 짐승처럼 반응한다.

나는 밥그릇이 아닌 국그릇에 밥을 퍼다 담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한 그릇만 먹어야지." 하면서 밥을 다.

"아냐, 또 더 먹을지 모르니까, 한 술만 더 뜨자." 하고 밥을 담는다.

오늘은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이 찌개 외엔 다른 건 불협화음과 같다.

다른 반찬과 썩이면 찌개의 본연의 맛을 잃게 되어 입맛이 뚝 떨어진다.

쉼 호흡을 한 번하고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냄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숟가락이 국물의 표면 저항을 뚫고 서서히 국물 속으로 잠긴다.

삼분의 일쯤 겼을 때 숟가락을 5도 정도 기울여서 숟가락에 국물을 담고 뜬다.

도둑 걸음을 하듯 아주 천천히 숟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입속엔 마른 논바닥에 물이 고이듯 침이 고인다.

다 왔다.

들어간다.

입을 다문다.

입술을 다문채 숟가락을 뺀다.

입속에선 요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온몸에 모든 세포가 순식간에 고슴도치 가시처럼 빠짝 선다.

나는 토렴식 말아먹기를 좋아한다.(내가 붙인 이름이다)

밥 한 숟가락에 찌개 한 스푼 떠먹는 것도 아니고 찌개를 퍼다 밥을 다 말아먹는 것도 아니다.

숟가락으로 찌개를 퍼서 밥에 올리고 찌개 국물이 스며든 부분을 살짝 비벼서 먹는 것이 나의 토렴식 말아먹기다.

숟가락으로 떠올린 찌개는 두부든 김치든 고추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숟가락에 담는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떠서 밥에 올린다.

편식하지 않고 뭐든 다 먹는다.

고기는 역시 돼지고기.

그것도 껍데기가 있고 비계가 반이상 붙은 돼지고기가 일품이다.

찌개 국물과 김치와 돼지고기가 어우러진 토렴은 입속에서 카멜레온보다 더 변화무쌍한 환상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

한 숟가락 크게 떠 넣은 밥은, 찌개 냄새와 밥 냄새가 혓바닥을 스치며 혀 돌기를 일으켜 깨우고 이어서 씹히는 밥과 김치의 식감은 살짝 굳힌 양갱의 식감처럼 겉아속촉 같다.

푹 익지 않고 아삭 하게 익은 김치.

돼지기름에 절여져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김치는 모시옷 너머 살짝 비치는 여인네의 속살 .

나는 정성을 다해서 씹는다.

나는 빠르게 꼭꼭 씹는다.

입에 들어간 밥이 반 정도 남았을 때 고기가 제대로 씹힌다.

지방이 터진다.

비계와 살코기의 육즙이 쭉 나오면서 김치와 어우러진다.

"카하~", "이맛이지!"

....

"으~아악"

죽음이다.

껍데기와 비계가 어금니 사이에서 터지며 느끼한 기름이 흘러나온다.

매콤 짭짤한 국물과 한 번 만나고 남아있던 밥알과 또 썩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맛과 풍미가 입안 가득 터진다.

"뭐라고 말하지!"

"그냥 맛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맛이라.

누군가가 삼겹살을 하늘이 내려준 음식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늘도 모르는 맛일 것이다.

어느새 국그릇에 퍼온 밥이 바닥을 보인다.

한 그릇만 먹자고 고봉으로 퍼온 밥인데 벌써 다 먹었다.

"그래 조금만 더 먹자"

나는 그릇을 들고 밥솥 앞에 서서 아까와 같은 맘으로 밥을 담고 있다.

또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이제는 안돼"

떨어지지 않는 숟가락을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서 떼어낸다.

그리고 그릇 가득 물을 붓고 한입에 쭈욱 마시고는 아직도 반쯤 비어 있는 내 뱃속을 채워본다.

나는 뚫어지게 냄비 속 찌개를 바라본다.

"야~, 고놈 참 맛있다."

"먹은 게 아까울 정도야."

내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고맙다.

눈물 나게 고맙다.

신도 모르는 이 맛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나의 아내에게 나는 감사하며  감사한다.

이 세상 하나뿐인 나의 아내에게.

나는 읽다만 하루키 책을 책장 그 자리에 꽂아둔다.


작가의 이전글 밥 먹고 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