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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Aug 21. 2024

슬기로운 중고생활

장난감, 책, 옷, 가방, 화장품, 가구, 주방용품, 생활용품, 캠핑용품, 전자제품, 기프티콘.

내가 여태까지 중고거래를 했던 물품들이다. 야채마켓 거래온도가 47℃, 재거래희망률 100% (71명 중 71명이 만족)의 높지는 않지만 제법 준수한 성적을 가진 중고거래 중수쯤 되려나? 아니면 판매 횟수에 비해 구매 횟수는 현저히 적으니 하수이려나?


예전에는 학교에서 ‘벼룩시장’도 종종 열리고,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 운동’까지 하며 중고 활용을 독려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여러 가지 중고거래 앱들이 나와서 훨씬 편하게 중고 거래가 가능한 것 같다.  

팔기에는 좀 애매하나 버리기에는 아까운 물건들은 드림하기도 하고, 나도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책들을 드림받기도 한다. 그래서 제일 저렴하게 판매한 물건은 0원이고, 가장 비싸게 판매한 물건은 무려 백만 원을 받은 노트북이다. 가격대가 높았던 만큼 제법 오래 ‘판매 중’ 명찰을 달고 있던 그 아이를 ‘판매완료’로 바꾼 날 치킨 두 마리로 자축파티도 했다.



나의 첫 중고거래 품목은 ‘PMP-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portable media player)’였다. 지금 아이들은 아마도 이게 뭔지 모를 정도의 고대(!) 유물. 당시 나는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도 높고 친구들 사이에선 나름 얼리어답터였다. PMP에 한번 꽂히자마자 '이거못사면안됨 병'에 걸려 피땀 흘려 모은 한 달 알바비를 고스란히 PMP 사는 데에 바쳤다.

요게 바로 PMP!

높은 관심만큼 기계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지 못했기에 이게 정말 하자인지, 아니면 사기꾼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건지 구분할 수 없으므로 전자기기는 중고가 아닌 무조건 새것으로 사는 편이다. 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검색하여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른 후, 케이스와 보호필름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준비하여 나의 소중한 PMP를 영접하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수많은 밤을 함께 지새우며 일드(일본 드라마) 점령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PMP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급전이 필요해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내야만 했다. 가시는 길 곱게 보내드리려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고, 잘 놔둔 박스와 설명서, 부속품들을 챙겼다(중고 거래 시 박스가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제품의 몸값을 높여주는 요소이다).


중고 사이트에 올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여기저기서 입질이 왔다. 괜한 트집을 잡거나, 깎아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거래 위치도 가까운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신촌역 2번 출구 계단 올라가기 전 의자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미리 와서 기다리는데 수상한 남자가 보였다.


“혹시 중고거래.. 죄송합니다.”

“저기 혹시...PMP...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여기저기 말을 걸고 다니며 죄송하다 인사만 꾸벅거려서 '도를 아십니까'인 줄 알고 나한테도 올까 봐 긴장하며 노려보고 있는데 가만히 말을 들어보니 확신이 생겼다.

저 사람이구나! 나는 일어나서 그 남자한테 다가갔다.  


“OOOO님이시죠? 제가 PMP 판매자입니다.”

“아, 저는 당연히 남자분인 줄 알고 엉뚱한 사람들한테만 물어보고 다녔네요.”


머쓱하게 웃는 남자 앞에서 박스를 열어 물건을 보여주고 설명을 했다.

“제가 애지중지 쓰던 거라 기스도 하나도 없고 정말 깨끗해요. 혹시 PMP 써보셨어요? 쓰실 줄 아세요?”

“아니요. 궁금해서 한번 써보려고 했는데 마침 물건이 올라왔길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오지랖이 넓다. 내 소중한 ‘피둥이’를 데려가는 저 사람이 쓸 줄 모른다고 몇 번 만져보다 방치할까 봐 조바심이 생겼다.

"그럼 제가 기본적인 것만 몇 가지 알려드릴게요." 하자, 그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럼 자기가 밥을 사겠단다. 별것도 아닌데 밥까지 얻어먹어도 되나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내 한 달 알바비만큼을 한방에 현금으로 구매하는 통 큰 구매자님께 그 정도는 부담이 안 될 듯싶어 근처에 적당한 분식집으로 가자고 했다.


기본적인 기능을 알려주고, 서비스로 넣어놨던 최신 영화를 틀어주자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구매자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동하면서도 보고 싶어서 사는 거라고, 안 그래도 못 본 영화인데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맛있는 밥도 먹었겠다, 리액션도 훌륭하겠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최신영화가 많은 사이트’라는 고급 정보까지 슬쩍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의 첫 중고 거래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가지고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혹시 테이블 구매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언제 어디서 보는 게 좋으세요?”


판매목록에 담긴 5개의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나의 슬기로운 중고생활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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