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세월이 무섭다. 벌써 두 번째 받는 운전면허 갱신 안내문이다. 내 면허는 ‘1종 보통’이다. 내 또래 여자들은 굳이 시험도 어렵고 취득 비용도 비싼 1종을 따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도 한 명도... 아니, 딱 한 명 있구나. 고등학생 때 수능 시험을 망치고 자기는 배추사서 트럭에 싣고 팔 거라며 친구들이 대입 원서를 쓸 때 운전면허 접수 원서를 썼던 내 친구 권양. 아마도 지금 1종을 보유한 사람들은 2종으로 땄다가 무사고로 승급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마누라도 차도 빌려줄 수 없다는 소신을 가지신 아빠가 "스스로 차를 사서 몰 수 있을 때 면허를 따라. 그때 따도 충분하다." 하셨기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 면허를 땄다. 차는커녕 면허학원 등록비도 버거운 형편이었으나, 같은 팀의 여자선배 두 명이 세 명을 모아 오면 학원비를 파격적으로 할인해 준 댔다며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같이 접수를 했다.
사실 나도 굳이 ‘1종 보통’을 딸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살짝 미쳐있던 상태라 회사를 그만두면 퇴직금을 받은 뒤, 근사한 SUV 차량을 한 대 뽑아서 전국 일주를 하고 싶었다. 굳이 SUV였던 이유는 차에서 누워서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그때 내 주변에 SUV 차량을 모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너였던 두 사람이 SUV를 운전하려면 1종 보통이어야 한다기에 나는 당연히 그 말을 믿고 접수했다. 운전면허 학원에서는 무슨 사유로 1종을 따는지, 정말 1종이 맞는지 계속 확인을 했다. 한번 신청하면 못 바꾼다느니, 교육비도 더 비싸고 이수 시간도 더 길다고 하니까 괜한 오기가 생겨서 ‘1종 보통’ 확실하다며 당당히 일시불로 결제를 했다. 회사에 와서 접수한 얘기를 했더니 다들 웃는 것이었다. 그걸 믿었냐면서. 그때는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모르던 때라 ‘니들이 그랬잖아!’라며 속으로 억울해했지만 겉으로는 면허 따면 회사차 운전할 거라고 큰소리를 땅땅 쳤다.
당시 회사 소속 밴 차량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대리기사들이 외제차도 꺼려했지만 밴이라고 하면 절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왔다가 차를 보고 그냥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코치 중에 한 명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셔서 합격을 했다. 회식 후에 숙소까지 운전을 전담할 사람이었다. 나는 “최코치님! 저 면허 딸 거니까 이제 술 마셔도 돼요. 한 달 뒤부턴 제가 운전할게요!” 하고 당당하게 접수증을 보여주어 코치진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의 운전면허 취득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비슷한 차였던 것 같다
일단 운전석에 앉아본 경험 자체가 없었던지라, 학원에 있던 운전 기계로 조금 연습하고 필기시험을 대비한 공부부터 했다. 단 한 문제만 틀린 우수한 학생인 나는 드디어 실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연습 트럭에 올랐다. 그전까지는 보통 세단만 탔기 때문에 운전석이 이렇게 높은지 몰랐다. 그런데 핸들도 너무 높게 있는 것 아닌가. 거짓말 살짝 보태서 눈높이에 핸들이 있었다.
나를 가르치는 강사님은 레버를 내려 최대한 좌석을 높게 조정하고 앞으로 바짝 당겼다. 의자를 세팅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앞에 선 보여요?” 물었다. “어떤 선이요?”
운전면허 전문학원에서 면허를 따본 사람은 아마도 알 것이다. 면허 학원 코스에 있는 돌 하나조차도 허투루 놓인 것이 없다는 것을. 사이드 미러에 도로 반사경이 나타날 때까지 핸들을 왼쪽으로 돌려라, 백미러에 나무가 보이면 그대로 핸들을 바르게 놓고 후진해라 등등 일명 ‘공식’으로 불리는 노하우를 위한 중요한 장치인 셈이다. 차에 비해 덩치가 작았던 나는 공식은 고사하고 출발선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강사님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 안 되겠던지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로 들어가시더니 방석 하나를 가져와서 앉아보라고 했다
"이제는 저 선 보여요?" "아니요"
강사님은 아까보다 조금 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방석을 하나 더 가져왔다. 누가 앉아있던 걸 빼앗아 오기라도 한 듯 따끈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이제는 보여요?" "네"
썩 편하진 않았지만 다음번엔 어떤 걸 가져올지 몰랐기에 그냥 괜찮다고 대답하고 허리를 최대한 꼿꼿이 세웠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소리지만 가르치면서 계속 여자는 1종을 딸 필요가 없다느니, 배추장사라도 하려고 하냐느니 하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밴의 사진을 찍어갔다. 저 이거 몰아야 해서 1종 따는 거예요! 하니까 그때부터 아무 말도 안 하셨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어서 강사님은 그냥 나오다가도 나를 보면 다시 후다닥 들어가서 양손에 방석을 흔들며 나타나시곤 했다. 방석 두 개의 도움을 받아 나는 무사히 면허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비록 비싼 보험료를 핑계로 절대 운전석에 앉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퇴사할 때까지 밴을 몰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방석 없이도 SUV 운전이 가능한 ‘1종 보통 면허증’의 당당한 보유자다.
다음번 면허 갱신 전에는 ‘SUV로 전국 일주’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는 길 외에는 아직도 바짝 긴장하는 나에겐 멀고 먼 꿈인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