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톤 Nov 03. 2024

부끄러움을 잘 아는 어른으로 살아갈 것

<오만과 편견>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만과 편견>을 읽고


이 작품을 읽고 이 책의 제목처럼 나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오만과 편견은 무엇일까. 대상은 무엇이고 그 내용물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오만과 편견이 옅은 상태로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면서 서로에 대해 진심을 확인하며 사랑의 결실을 맺는 로맨스 소설이다. 사랑하는 연인 관계를 넘어서서 그 바탕에는 오만과 편견이 인간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오만과 편견에 갇혀있을 때와 그것을 극복했을 때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 통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오만과 편견의 관계성이 달라질 때마다 극 중 인물의 관계 역시 달라지는데, 독자로서 그 심리를 따라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작품 줄거리 

엘리자베스는 베넷 가문의 둘째 딸로, 다섯 명의 딸들 중에서 현명하고 재치 있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인물이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의 성품을 인정할 정도로 엘리자베스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엘리자베스 역시 사람이기에 잘못된 자기 확신으로 인해 오만해지고 그 결과 그릇된 편견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된다. 그녀는 다아시라는 인물을 무도회에서 처음 만나는데, 그녀가 느낀 첫인상과 다른 사람들의 일부 이야기만을 가지고 그를 재단한다. 그녀가 보고 들은 작은 면모를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있는 오해가 풀어지면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진심으로 부끄러워한다.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믿음으로 그를 판단한 사실이 얼마나 자신이 오만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물론 그녀가 다아시에 대해서 편견을 갖게 했던 그의 일부 행동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은 면이 다아시라는 사람의 인성 전체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부의 행동으로 그를 완전히 못되고 무례한 인간으로 대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를 그렇게 나쁘게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이유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오만함에 갇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만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아시의 진심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오만함이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키웠다는 것을 깨닫고 다아시에게 사과한다. 다아시 역시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그녀에게 사과하며 반성한다. 엘리베스와 다아시는 서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엘리자베스처럼 오만하다 

현명한 엘리자베스 역시 오만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이 옳다는 강한 확신이 생겼을 때 가장 오만했다. 이미 자신의 생각이 견고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에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다른 다아시의 이야기는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신중하게 내린 결단이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작은 틈'을 남겨두어야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확신' 그 자체로서는 옳고 그른 게 아니지만 내가 강하게 믿고 있는 것이 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할 수 있는 틈의 여백을 놓아두는 것이 오만함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나는 판단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늘 어떤 것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때문에 무언가를 잘못 판단하는 것에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어떤 대상을 보면 본능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작은 편견의 조각들이 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가치관을 바탕에 두고 나만의 가치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 같다. 가치판단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나와 다른 관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진 생각을 갖게 된다.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편견을 갖게 된다. 가끔은 확신이라는 이름 아래 오만함이 편견을 키우는데, 그렇게 오만과 편견의 그림자는 늘 가까이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덜어내는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를 따라다니는 오만과 편견의 그림자를 옅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단연 나를 위해서다. 건강한 내면을 가지고 싶으니까. 그랬을 때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원활해지고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 







오만과 편견의 반대편에 서있는 '관대함'

음, 다른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오만해지는 것 같다. 그때의 생각은 '나는 그러지 않는데 왜 너는 그렇게 행동할까',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사고라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편견이 생기게 된다. 결국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태도로 서있게 되면서 오만해지는 것 같다. 오만함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해지면 오만해져서 오만해진 줄 조차 모르는 상태까지 가는 거 같고. 나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오만함에 갇혀있게 된다. 




어렸을 땐 생각은 경험도 적어서 다양한 섬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와 크기가 다르고 색이 다른 섬을 만날 때 놀래기 바빴다. 그런 태도로 있었을 때 나와 다른 것을 보며 은연중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다.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들이 많이 더해졌다. 그 생각은 다시 누군가 자신과 다른 나를 보며 그럴 수도 있다며 나에게 관대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나에게도 어떤 불편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타인의 모습도 충분히 넘어가도 괜찮은 것으로 보게끔 해주었다. 




오만해지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관대한 마음이었다. 나의 불편한 모습을 인간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타인의 행동도 그렇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타인의 행동이 선을 넘지 않는다는 선에서, 다른 사람의 못된 모습, 이기적인 모습, 영악한 모습, 불편한 모습도 다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상대방이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고백한다면,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있었던 이유는 상대방이 마음을 감싸줄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을 인정했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가지고 더 몰아세울 것 같다면 용기 내어 솔직해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인간적인 실수라고 안아주는 관대함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만함을 '옅게' 만들 수 있다 

오만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옅게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만함을 잘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진짜 나의 마음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내가 정말 오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니체는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만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잘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할 것 같다. 그래서 염치 있게 살고 싶어서 계속 잘 부끄럼움을 잘 느끼고 싶다. 오만함을 깨닫는 시간이 있다면 그 부끄러움을 빨리 인정하고 싶다. 그 편이 오히려 불안감에서 가장 빨리 해방되는 것일지도. 




이번에는 오만함을 예방하는 차원의 방법을 생각해 봤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그것에 관한 어떤 주제라도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사람들의 생각이 참 다르구나, 였다. 덕분에 많은 것들이 옳고 그름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의식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재단하는 일도 의미 없다는 것 또한 더 자주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때, 오만과 편견을 조금씩 예방할 있는 같다. 






염치있게 살자 

나를 안정감 있고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오만함을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인내하는 일인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을 인지했다면 그것을 회피하지 않을 때, 계속 감추려고 하지 않을 때,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을 덜어낼 수 있다. 사람이기에 또 오만하겠지, 자만하기도 하겠지, 무지하겠지 싶다. 그래도 계속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있는 용기가 있다면 조금씩 더 건강해질 것 같다. 계속 염치있게 살고 싶다. 부끄러움을 계속 알고 느끼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이상하게' 살아도 괜찮아, 하나도 안 이상하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