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웃지요.
어린 시절부터 얼굴이 유난히 쉽게 빨개지는 편이었다. 주변에서는 이를 ‘촌년병’이라고 은근히 부르곤 했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이 증상의 정확한 이름이 ‘안면홍조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면홍조는 얼굴이 갑작스럽게 붉어지는 현상으로, 그 원인은 다양하다. 특히 가장 흔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감정의 변화’다. 부끄러움, 긴장, 당황, 분노 등 여러 감정이 촉발 요인이 될 수 있다.
나는 부끄럼이 많은 성격이었고,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주시 불안도 있었다. 친구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다기보다는 부담돼, 막상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오면 심장이 쿵쾅대고 온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에게 안면홍조증은 필연처럼 따라왔다. 또한 타고난 하얀 피부는 증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학창 시절의 나에게는 두 가지 별명이 동시에 따라다녔다. 얼굴이 하얗던 평소에는 식빵이었다가 얼굴이 빨개지면 잼 바른 식빵이 되었고, 평소엔 아오리 사과였다가 금세 빨간 사과로 불리곤 했다. 별명 짓기에서만큼은 유난히 창의력이 넘치던 아이들은 나의 안면홍조를 놓치지 않고 놀림의 재료로 삼았다. 존재감이 적은 편이었던 나에게 별명이 유독 많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 붉어지는 얼굴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면홍조는 내게 늘 불편함을 안겼다.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고, 그 주목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원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인데, 나의 얼굴은 감정이 가장 먼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위였다. 그럴 때면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더 난감한 건, 단지 당황해서 빨개졌을 뿐인데도 종종 ‘화났다’고 오해받는 상황이었다. 화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기 위해 애써 웃어 보이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피로감까지 쌓여갔다.
이런 어려움은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크게 다가왔다. 사회에서는 감정 조절이 기본처럼 여겨지는데, 안면홍조는 그런 상황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발표나 면접, 회의, 업체 미팅처럼 긴장되는 자리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면 불편함은 배가됐다. 의지와 상관없이 드러나는 반응이라는 점이 내게는 부담이었고, 때로는 나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조차 빼앗아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안면홍조를 가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다. 얼굴이 조금이라도 붉어지는 느낌이 들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늘 하나였다. ‘아, 또 빨개졌다.’ 그 생각이 불씨가 되어 긴장을 더 끌어올렸고, 올라간 긴장은 다시 홍조를 더 짙게 만들었다. 결국 얼굴이 빨개져서 긴장하고, 긴장해서 더 빨개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리고 홍조라는 몸의 반응 그 자체보다, 그 반응을 둘러싼 생각과 감정이 더 괴롭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지금 표정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해석과 불안이 홍조의 불편함을 훨씬 더 증폭시켰다. 결국 나를 괴롭힌 건 얼굴의 붉은 기운보다, 그 붉음에 줄줄이 따라붙는 마음의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홍조를 어떻게든 숨기려 애쓰는 대신, ‘어차피 내 몸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신호일뿐’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편해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중요한 순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라도, 그것이 곧 나의 부족함이나 미숙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천천히 이해해 보려고 한다.
또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다 보니, 사실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약점과 민감한 지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는 그게 단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말이 떨리고, 누군가는 손이 차갑게 식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런 모습들이 나만의 문제도, 특별히 이상한 반응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결국 안면홍조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빨개졌어도 괜찮다’, ‘지금 이 감정이 자연스러운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자 몸의 반응도 예전만큼 거세게 올라오지 않았다. 홍조를 극복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예전처럼 홍조가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홍조를 다루고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