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한 때가 더 오래 남는다.

by 담하

처음으로 여행이라는 것을 시작한 건, 코레일에서 운영하던 ‘내일로 기차여행’을 통해서였다.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정해진 기간 동안 일반 열차의 자유석과 입석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패스권. 지금은 연령 제한이 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만 25세 이하에게만 주어지던 특권이었다. 그 기회를 놓치기 싫어, 나는 친한 언니와 함께 전국 여행에 올랐다. 스스로 선택해 떠난, 내 생애 첫 진짜 여행이었다.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인지, 그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이후 나는 틈틈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낯선 풍경 앞에서 문득 들려오는 작은 울림이 좋았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는 사색의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과 여행 일정을 맞추기 어려워졌고, 자연스럽게 혼자 떠나는 여행이 많아졌다. 혼자라고 해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늘 바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속도를 늦추고, 내면을 향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1년에 한 번쯤은 짧게라도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은 여행의 시작은 준비하는 것부터 라고 말한다. 여행지에 관해 알아가고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설렘을 준다. 여행 초보였던 나는 여행을 위한 계획에 치밀한 편이었다. 뚜벅이 여행자였기에 교통편 확인은 기본이었고, 관광지 개방 시간을 고려해 세세한 동선을 짰다. 3박 4일 일정이라면 A4용지 세 장은 너끈히 넘길 정도로 촘촘한 계획을 짜곤 했다.


그러다 결국, 국내 여행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은 어떤 마음이 나를 더 먼 곳으로 밀어냈다.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스무 살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해 살던 나에게 시간도, 돈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체력상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들자.’는 결심으로 비행기 표를 먼저 끊어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는데, 국내 여행을 준비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고 벅찼다. 3주 동안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 막막했다. 애를 써봤지만, 결국 2주 분량의 일정만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이전의 치밀함에 비해 한참 부족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유럽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인’하고 로마에서 ‘아웃’하는 일정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까지 다섯 나라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스페인까지는 어느 정도 계획이 있었지만 스위스부터는 발길 닿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 도착한 어느 오후였다. 점심 무렵 도착해서 알프스 산이나 다른 관광지를 가기엔 애매한 시간이었고, 숙소에만 있기엔 아쉬웠다. 그래서 에메랄드 빛 툰 호수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어딘가 닿겠지’ 싶은 마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배고픔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려 했지만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고, 다음 버스는 한참 뒤였다. 걷다 보니 꽤 외진 동네까지 와버린 것이다. 지치고 짜증이 밀려왔다. ‘왜 무작정 걸었지?’ ‘버스 시간부터 확인할 걸…’ 하는 후회가 연달아 올라왔다. 하지만 후회한들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작은 비치바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 앞에 있는 아담한 바였고, 그 앞에는 선베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해 선베드에 누워보았다. 그 순간, 반짝이는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수면 위에서 부서지며 만든 윤슬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조금 전까지의 짜증과 피로가 스르르 풀려나갔다.


유럽 배낭여행 동안 나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관광지를 돌았고, 해가 질 때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새로운 것을 보는 게 좋아 끼니도 간단히 때우기 일쑤였다. 그런데 모든 여행을 마친 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순간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바로 그 비치바에서의 여유였다. 에메랄드빛 호수, 햇살, 새소리, 호수의 잔물결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잔잔한 공기… 그 무해한 풍경은 내 몸과 마음을 조용히 이완시켰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었다. 마음이 편안했던, 그 조용한 한때였다. 그 뒤로 나는 서둘러 많이 보려 하기보다 여유를 지키는 여행을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가끔은 욕심이 생겨 발걸음이 빨라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인다. 결국 여행에서 남는 것은 특별하고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던 그 평온한 한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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