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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 Jan 22. 2024

명의(名醫)

2023년 4월 7일 금요일 용산구 피부과

백반증 의심으로 처음 병원을 방문한 이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 동안 아이의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폈다. 변화가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속눈썹 주변 눈두덩이가 하얘졌다. 나를 제외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남편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백반증 명의를 찾고 싶어 알음알음 정보를 모았다. 우선 종로구에 있는대학 병원 한 곳을 예약해 두고, 우리나라에서 백반증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용산구 백반증 전문 병원에도 문의했다. 개인 병원임에도 예약이 쉽진 않았다. 최대한 빨리 진료를 보고 싶었으나 일주일을 기다린 뒤에야 초진이 가능했다.


이미 진료를 예약해 둔 상태였지만 대기 시간이 길었다. 이제 막 걷는 것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진료실이 있는 3층부터 주차장이 있는 지하 1층까지, 대략 사십 번쯤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아 아이의 지루함 섞인 울음이 시작됐을 무렵 드디어 차례가 됐다. 1시간 40분을 기다린 결과였다.


해당 병원의 대표원장인 H선생님은 백반증으로 내로라하는 분이시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백반증이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1980년대부터 백반증 연구를 시작하신 신분이다. 얼굴에 생긴 백반증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임상으로 최초 발견해 세계 의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 분이셨다. 무작정 신뢰가 갔다.


몇십 년간 수많은 환자를 보며 다양한 사례의 백반증을 연구한 선생님조차도 나의 아이를 보곤 "어쩌다 이렇게 어린 아기가..."라며 탄식하셨다. 병원에서 대기하며 느낀 바가 있었다. 백반증 환자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했다. 몇몇 어린 친구들을 보긴 했지만, 나의 아이보다 어린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만했다. 어릴 때 생기는 백반증은 유전적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백반증 환자의 30% 정도 비율을 차지한다. 나이 들어서 생기는 병은 환경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도한 때밀이, 자외선 노출, 잦은 염색으로 인한 두피 자극 등의 피부 마찰로 생기는 것이다. 이제 고작 13개월을 산 내 아이를 본 선생님이 가장 먼저 "혹시 집에 백반증 환자가 있어?"라고 물으신 배경이다.


남편과 나에게 백반증 가족력은 없다. 우리가 뵌 적 없는 선조에 이 병을 앓고 있던 분이 계시는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렇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갸우뚱했다. 이렇게 어린 아기 중 유전이 아닌 케이스는 드물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진료실을 암전한 후 우드 등으로 아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아이는 불이 꺼지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 얼굴을 잡는 것이 불편해 울먹거렸다. 나는 그런 아이를 끌어안고 의사가 "백반증은 아니네."라고 말해주길 기도했다. 우드 등 검사는 10초 남짓으로 끝났다. 그만치 눈여겨볼 부위가 없었다.


"아직은 보이질 않아. 백반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거지. 그런데 의심스러운 게 있긴 해. 흰 눈썹은 백반증 의심 신호긴 하거든. 일단 연고를 처방해 줄게. 아주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인데 아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잘 발라주고 일주일 뒤에 다시 보자고. 그래도 엄마가 일찍 잘 찾아왔네. 앞으로 더 자세히 관찰해."


기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게 첫 진료가 끝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얼떨떨한 감정으로 병원을 나온 남편과 나는 비로소 허기를 느꼈다. "일단 밥부터 먹자"며 식당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나와 점심 식사를 마치기까지 약 1시간 30분 동안 우린 백반증과 관련한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온 김에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아직은 쌀쌀한 4월 초 평일 낮이었지만 덕수궁 안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아이의 느린 속도에 맞춰 발자국을 찍고 있자니 비로소 걱정이 쏟아졌다. 모든 일에 최, 최, 최악을 생각하는 나는 의사의 명쾌하지 못한 진단을 자꾸 곱씹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남편이 "다른 병원을 가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돼. 그래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니 희망을 갖자"고 했다. 생각이 많은 엄마와 아빠 곁에서 아이는 더럭 땅에 주저앉아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한껏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는 까르르거리며 한참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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