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상 바오로 Oct 29. 2022

따릉이

지나가겠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자전거 경적을 '따릉이'로 불러왔다. 자전거 벨 소리를 묘사하는 단어는 '따르릉' 이외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자전거' 동요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서울시는 한 발 더 나아가 '따릉이'를 고유명사로 만들어 버렸다: 서울특별시 공공자전거 서비스의 이름을 '따릉이'로 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전거에 따릉이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두 바퀴로 굴러가는 기물의 움직임이 사람의 걸음걸이나 뜀박질보다는 상당히 빠르기 때문이다. 해서 따릉이에는 따르릉 소리를 뒤통수로 듣거들랑 좀 비켜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내 자전거에도 '따릉이'가 달려있다. 다만 실제 소리는 '따릉 따릉'보다는 '칭칭~'에 가깝다. 쇳조각을 긁는 방식이 아니라 종으로 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비싸고 빠른 자전거를 타는 이들의 대부분은 따릉이를 달지 않는다.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매끈한 자전거 핸들바에 뭘 덕지덕지 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라이들에게는 이 조그만 녀석도 사중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에어로 다이내믹스에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아마추어가 뭐 그 정도까지... 차라리 뱃살을 빼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세 번째로는 항속으로 이동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따릉이를 작동하기 위해 핸들바를 고쳐 잡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관성의 잘못된 로는 사람을 보아도 쉽사리 멈추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속으로 이동하는 자전거에서 발하는 '따르릉' 소리가 미치는 범위는 충분히 넓지 않다. 해서 이들은 큰 목소리로 "지나가겠습니다" 하면서 지나간다.


수도 없는 "지나가겠습니다"를 겪고 난 후 나 또한 어디 내놓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자전거를 마련했다. 해서 에헴 하는 심정으로 "지나가겠습니다"를 시도해 봤는데, 이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인토네이션의 문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가겠습니다"를 가지런한 톤으로 발음하지 못한다. 내 발음의 등고선은 난데없는 고원과 닮았다. 모자를 삼킨 보아뱀 모양을 상상해도 좋겠다. '지'에서 화산 폭발하듯 급상승하여 '나가겠습니'는 세석평전처럼 평평하고 '다'에서 천불동 계곡처럼 급강하하여 어설프게 소멸한다. 쫄쫄이들이 구가하는 그 쫀득한 멋이 없다. 둘째 "지나가겠습니다"는 대부분이 보행자 또는 저속 자전거를 타는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방식이 아니다. 지나갈 테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보행자 입장에서는 무례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다. 해서 나는 "지나가도 되겠습니까?"를 시도해 봤는데, 한 호흡에 뱉기가 어려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하게 되어 번번이 '지나가도 되'에서 끊겼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시건방진 라이더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해서 지금은 (최소한 서울 사람들에게는) '지나가겠습니다'가 파레토 옵티멈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문제인 것이다. 목소리 좋은 서울 사람의 '지나가도 될까요?'를 녹음해 따릉이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유치한 상품은 없는 것 같다. 해서 나는 오늘날도 자전거를 타다 추월할 일이 생기면 죽어라 따릉이를 눌러댄다. 나 보다 빠른 이들은 여전히 "지나가겠습니다" 하면서 지나간다. 나는 그들의 뒤통수에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네~" 한다. 그래야 대화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트랙터를 타고 뒤따라오는 젊은 일행들을 돌아다보며 예지게이는 그들 중에 기도문을 단 한 구절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진정으로 마음이 괴롭고 슬펐다. 기도문 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묻을 수 있을까? 어떤 말로 그들은 사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걸치는 시기를 포괄하면서 미지의 존재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고인의 출발을 요약할 것인가? <잘 가시오, 동무, 우리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라고? 아니면 다른 어떤 말도 안 되는 소리들로? ('백년보다 긴 하루', 칭기즈 아이뜨마또프)


과거 쌀집 자전거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며 내던 정겨운 따릉이 소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자전거의 환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오늘날 자전거 고속도로에서 울려 퍼지는 "지나가겠습니다"에는 그런 환상이 부재한다. 보다 싼 자전거를 타는 이들의 부러움만을 전리품처럼 챙겨가는 듯하다. 그러니 이제 자전거는 보행자와 가깝다기보다는 자동차와 가까워졌다. 속도와 주행 문화뿐 아니라 가격마저도. 이마저도 자동 주행차가 상용화되면 보행자들은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더 위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지나가겠소, 동무, 비키시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말도 안 되는 위협으로? 그렇지 않으면 보행자와, 그리고 길과 대화를 시도할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배울만큼 배운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