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진(秦)나라의 같은 발음의 ‘진’이지만 한자가 다른 진(晉)이라는 제후국이 있었다. 시조는 희우(姬虞)이지만 후에 당(唐) 땅에 봉해진 어른(叔)이란 뜻으로 당숙우(唐叔虞)라 불렸다. 주나라 무왕의 아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의 배다른 아우가 된다.
무왕이 천자가 되고 2년 만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성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문왕의 넷째 아들로 무왕의 아우이자 성왕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대신 섭정이 되었다. 조선시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과는 달리 주공은 어린 성왕의 왕위를 빼앗지 않았다. 7년간 어질고 현명하게 천하를 통치했다가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돌려주고 노나라의 제후로 봉해지며 유교에서 길이 칭송받았다. 공자는 꿈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성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10대 초반 정도의 나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어느 날 아우 우와 소꿉놀이를 했다. 천자여도 영락없는 아이구나 귀여워보이지만 천자의 소꿉놀이는 남달랐다. 그는 오동잎을 동생에게 주며 “이것으로 너를 제후로 봉하노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오동나무는 주나라의 제후를 상징하는 손으로 쥘 수 있는 물건인 홀(笏)을 상징한다.
송의 재상 범중엄의 초상화. 손에 홀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일을 전해 들은 주공이 찾아와 우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제후로 봉해지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성왕이 당황해하며 “농담이었습니다”라고 했으나 주공은 “천자에게 장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라며 우를 제후로 봉하게 했다. ‘오동나무 잎으로 아우를 제후로 봉한다’, 곧 천자의 말 한마디도 농담이 될 수 없기에 신중히 말해야한다는 동엽봉제(桐葉封弟)의 유래다. 당(唐)땅에 봉해졌으나 우의 아들 섭보가 도읍을 진수(晉水)로 옮겼기 때문에 나라 이름이 진(晉)으로 바뀌었다.
이때 우가 제후가 임명되도록 적극 추진한 이가 주공이 아니라 왕의 행적을 역사에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관 윤일(尹佚)이라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서 당나라의 유종원은 “땅과 백성이 달린 문제이니 군주는 덕으로 임명해야 하는 법이다. 소꿉놀이 대상이 내시였어도 제후로 봉했겠느냐”라며 현명한 주공이 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니 윤일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왕의 말에 담긴 신의를 중요시한 일화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다. 평원왕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악을 쓰고 울던 딸 평강공주를 유명한 바보 온달을 끌고 와 놀렸다고 한다. “너는 늘 시끄러워 정숙하지 못하니 귀족 집안에 시집가기 어렵겠다. 바보 온달의 신부가 딱 좋겠구나.” 그리고 막상 공주가 커서 시집갈 때가 되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안으로 혼처를 정하자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했는데 왜 지금은 귀족에게 시집 보내시려 하십니까”라며 반항했다. 이에 분노한 평원왕이 공주를 내쫓는다. 공주는 바보 온달을 찾아가 결혼한 뒤 그를 명장으로 키워냈다. 비록 신라와의 전투 끝에 온달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감동이어서 오늘날까지 드라마, 영화 등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평강공주처럼 자신을 출세시켜줄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남성의 심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온달 콤플렉스’라는 말도 생겼다. 이 반댓말로는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다. 서양 동화 중 몰락 귀족 신데렐라가 떨어뜨린 유리구두를 왕자가 주으면서 왕비가 된 이야기에서 본떴다.
온달전 이야기를 재해석해서 최근에 방영한 드라마 "달에 뜨는 강"
하지만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사실 공주가 온달하고 결혼한 과정은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한, 소위 진지충의 철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고려 시대 사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평강공주가 고집을 부리는 부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대왕께서는 늘 너는 반드시 온달의 신부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와 어떤 이유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십니까? 거리의 평범한 사내들도 자신들이 한 말을 다시 주워담지 않거늘, 하물며 가장 높은 지위의 분께서 그러십니까? 이 때문에 ‘왕은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귀족 집안에 시집가라는 명령은 잘못된 것이니, 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수시로 약속을 농담이라고 바꾸면 얄미운데, 하물며 모든 사람이 믿고 따라야 하는 왕이 농담을 즐겨서야 되겠냐고 공주는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왕도 사람이니 웃고 떠들수야 있지만 서주의 유왕의 예가 있다. 유왕은 제후국에 긴급 출동을 요구하는 봉화를 상습적으로 올려 군대를 소집하고 해산하는 장난을 쳤다. 사랑하는 미인 포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황권이 견고한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반복된 그의 행각으로 인해 결국 정말로 이민족이 침입해 와 봉화를 올렸을 때는 여태까지처럼 장난의 일환이라고 생각한 제후들이 응하지 않아 크게 대패하고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로 인해 주나라는 크게 천하를 통솔할 힘을 잃어 이른바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왜 왕은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역사가들의 연구에서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는 낭만적인 동화의 이야기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온달은 바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바보였다면 후에 명장이 될 리가 없다. 온달은 기족 귀족 출신과 달리 평민 출신에서 대두된 신흥 세력으로, 평원왕 때 약화된 왕권을 높이기 위해 공주가 평원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 세력의 대표 주자인 온달과 손을 잡은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금 낭만은 깨지더라도, 삼국사기 속 ‘농담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확실히 우리 마음 속에 새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