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새치야, 내가 눈웃음이 많아서,라고 우길 수 없는 때가 왔다.
30대 중반이 되니 외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노화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동안 소리도 꽤나 들으면서 살았는데. 나는 평생 안 늙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 말씀이 딱 맞다. 아직도 마음은 20대라고. 그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너무 잘 안다. 마음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겉모습만 무심하게 차곡차곡 늙어간다.
처음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 대놓고 뿌리부터 끝까지 하얀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이게 여기 왜 있지? 하고 그 한 가닥을 뽑아 휴지통에 툭 버렸다.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이제 내 머리엔 다 뽑아버리기에는 심히 망설여질 정도 많은 흰머리가 자라나고 있다. 급한 대로 정수리 부근 보이는 곳만 뽑고 나머지는 방치한다. 죄다 뽑았다가는 흰머리가 아니라 탈모를 걱정하게 될까 봐 두렵다. 예전에 나이 많은 선배들의 머리에서 흰머리를 보고선 아니 왜 안 뽑고 저걸 그냥 두는 거야?라고 경악했던 젊은 시절 나 자신에게 너도 곧 그렇게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 다른 눈에 띄는 변화는 주름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는 송혜교 관리법이 유행했다. 그건 그녀가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크림을 발랐기 때문에 눈가 주름이 절대 안 생기고 피부가 도자기같이 뽀얗다는 소문이었다. 유행에 휩쓸려 용돈을 모아 아이크림을 사긴 샀는데 쓸 수가 없었다. 어디에 아이크림을 발라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눈가 주름이 대체 어디에 생긴다는 거야? 눈두덩이에 아이크림을 대충 바르다가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 주름이 생긴다는 건지 아주 잘 안다. 송혜교처럼 미리 아이크림을 바르지 않은 대가로 나는 30대에 걸맞은 눈가 주름을 장착하고 있다. 설상가상 최근에는 팔자주름까지 깊게 파이고 있다. 로봇처럼 눈과 입을 최대한 안 움직이고 웃는 법을 연구하다가 거울을 보곤 관뒀다.
늙고 있음을 실감할 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늘어가는 흰머리를 볼 때, 진해지는 주름을 볼 때,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아마 그 감정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조금씩 나이가 든다는 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거니까. 그 사실을 평소엔 외면하고 살지만 흰머리와 주름이 계속해서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너는 죽어가고 있어.’ 예전에는 TV에서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탱탱한 연예인을 보면 나이 드는 걸 자연스럽게 두지 왜 저렇게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까만 머리와 탄력 있는 피부로 거울을 보고 싶다. 그러면 내가 매일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즐겁게만 살 수 있을 테니까.
얼마 전,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집 근처인데 점심 먹었니.’ 마침 점심을 안 먹었던지라 같이 먹겠다고 연락을 하고 나갔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셔서 평생 가족에게 애정 표현 한 번 제대로 해 준 적 없는 아버지인데 나이가 드시니 점점 변한다. 먼저 밥 먹자고 연락도 주시고. 국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아버지 얼굴을 쳐다본다. 꽤 오랜만에 마주 본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볼 왼쪽에 뭐가 묻어 있어서 닦으려고 봤더니 지워지지 않는다. 그건 얼룩이 아니었다. 작은 검버섯이었다. 순간 멈칫하니 아버지가 물어본다.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둘러대는데 마침 국밥이 나온다. 국밥을 먹으며 아버지의 검버섯을 생각한다. 말도 없고 무심한 아버지가 언제고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이제는 더 자주 아버지의 얼굴을 보러 와야겠다고. 민망하지만 망설이지 말고 더 자주 애정 표현을 해야겠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국밥을 들이켰다.
늙어간다는 건 마냥 유쾌하진 않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인이기도 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지금 네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고 미소 지으라고. 시간이 가고 있으니 더 네 인생을 즐기고 음미하며 살라고. 어쩌면 노화는 신체가 우리에게 주는 인생 문제의 답을 맞힐 수 있는 소중한 힌트가 아닐까? 오늘 거울에 비친 내 흰머리와 눈가 주름도 애정 어리게 보려고 노력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