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싫은데 사랑은 하고 싶다
사람이 너무 싫어질 때가 있다. 막상 생각만 하던 걸 활자로 적으니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이유는 뭘까. 아마 난 사랑을 하고 싶고 사랑을 믿고 싶던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제멋대로 퍼주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원망한 적도, 돌아오지 않는 답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자처한 적도 있다. 이런 나만의 사랑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게 많은 부분이 착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착각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뤄지지 못한 사랑 앞에서는 기대는 착각이 되고 이뤄진 사랑 뒤에서만 기대는 성취된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아름다운가? 오히려 수면 아래의 오리발처럼 처절하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런 말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사람이 싫다. 이미 받은 상처에 더 이상은 소금을 뿌려 아파보기도 했지만, 이젠 바를 연고조차 남아있지 않다. 나를 사랑했던 그들과 내가 사랑했던 그들. 공통점은 이별이란 큰 효과에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별은 참 슬픈 글자다. 나의 일부라 전부를 쏟았던 사람을 더 이상 못 보니 말이다. 그가 가는 길이면 다 좋고, 품에 안겨 미래를 꿈꾸었던 적이 있다. 변덕스러운 세상과 달리 영원을 꿈꾸며 사랑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이별 앞에서는 늘 곁에 있어준다는 약속도 사랑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 돼버린다. 허망하고 허망하다. 공허하고 공허하다. 낭만적인 사랑의 순간이 순간의 진심일 뿐 거짓말이 돼버린 세상 속에서 또다시 오리발을 내밀며 수면 아래서 발을 동동거릴 생각을 하면 속이 울렁일 뿐 이젠 앞으로의 연애에 대한 기대는 없다. 정확히는 기대하고 실망해 다시금 이런 울렁거림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대가 없어야만 한다. 주변에서 4년을 도대체 어떻게 연애했냐고 한다. 실은 나도 모르겠다. 이 정신없는 글도 내 마음이 얼마나 조각나 정리하기도 싫은 바닥의 휴지조각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아프다. 아파. 그럼에도 일상은 이어가야 하고 이별이란 병명은 없어 애통할지도 사랑에 치여 아직도 회복 중이라도 살아가야 한다. 아프다 해보았지만 결국은 꾀병으로 보이니 나는 살아가야 한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믿으며 웃으면서. 경련이 올 때까지. 그런 밤이면 하이볼 캔을 얼음컵에 담아 마시며 무표정으로 잠에 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