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마주하기
혐오를 느끼는 것과 표출하는 것은 대개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는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되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 있기에, 말의 형상을 충분히 정제할 수 있게끔 장치에 의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물론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타성으로 인한 혐오를 늘 맞닥뜨리며 괴로워한다. 나는 이를 마주해야 한다고 본다.
혐오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다. 누군가를 내 세계에 들여올 필요도 없다. 인내와 이해를 요구하지 않기에 가장 꾸밈없는 생각의 파장을 발산한다. 오로지 스스로의 관념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내재성을 띤 과정이기에 또 다른 자아의 산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사랑보단 증오가 훨씬 쉽다는 것을. 그렇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좇고 숭배하며, 그 이상에 언젠가 다다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결국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한다. 스스로의 추악함을 비탄하고 자해하며 말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혐오란, 손쉬운 도달이란 편리성을 제외하고는 이득이 될 것이 없어 늘 부정하고 가려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었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혐오는 인간에게 있어 필수재이다.
혐오는 기능적으로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요깃거리 또한 제공한다.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물어뜯고 싶어한다. 같잖은 선민의식인지, 약육강식의 본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늘 혐오를 소비재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가벼운 뒷담화부터 시작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던지는 돌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의 태도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이해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그를 정신병자에 사회부적응자로 매도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 희열과 편의, 번제를 한 번에 해결하게 되는 셈이니 누구 하나 반대하고 나설 이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혐오는 절대악이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떨쳐낼 수 없다. 죽을 때까지 함께 운명을 다하여야 한다.
다만 혐오의 전 단계를 인지할 수 있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기능적 폐해가 아닌 개인의 성숙을 위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화단과 같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그 땅 아래를 기어다니는 지렁이와 같다고 크리스타 K. 토마슨은 이야기한다. 지렁이는 토질을 고르게 하여 화단의 환경에 기여하기 때문에,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생물 중 하나이다. 지렁이를 잡아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다면 화단은 금세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렁이와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부정적 감정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두가 획일화되어 있지 않은 이 세상에서 마주해야 하는, 매우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니 이를 인정하고 마주해야 한다. 혐오는 우리의 시선에 따라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은 대개 내가 지닌 결핍과 불안함, 자기혐오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오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과 반성으로 회귀할 줄 아는 자만이 부정적 감정, 더 나아가 혐오를 컨트롤하고 비로소 당신의 모든 감정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반복적인 좀먹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