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살자는 말은 무책임하면서도 그 무책임한 마음을 감싸안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언제나, 한 글자도 빠짐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어서 지옥으로 끌려가야 마땅한 사람들이라든지, 죽든 살든 알 바 아니고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싶은 사람들을 위한 글은 하나도 쓰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나의 투박하고 엉성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몇몇 있다. 이 점을 알고 있는다고 딱히 내 글이 읽기 수월해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미량이라도 어떠한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특히 나의 장황하고 두서없는 글을 한 톨이나마 이해하는 데에.
"그래도 살아가라"는 말은 꽤 무책임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무책임한 말이다. 살라는 말은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정작 삶은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들 같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으면서, 죽음을 등외시하고 자살을 죄악으로 여기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무책임한 위선.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에 정말 모든 사람이 포함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구태여 더 말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인지 거부감인지 어떠한 염증이 있더라도, 인류애와 인간애가 얼마나 마음을 깊게 파고들어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곳에 몸을 웅크리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까지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나도 조금은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한 글이자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결국 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죽어서 운 좋게 다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대단하다.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일 테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 사람으로 산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 힘든 일이다. 특권이 막강한 만큼 치러야 하는 대가도 더없이 크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참 많은데. 이왕이면 새가 되고 싶다. 초원의 영양이나 얼룩말로 태어나자니 포식자들에게 뜯어 먹힐까 두렵고, 그렇다고 포식자로 태어나자니 풀밭에서 갓 태어나 다리를 휘청이며 일어나는 새끼 피식자를 집요하게 노리다가 이내 목덜미를 물고 사라지는 피라미드의 우위에 서고 싶지는 않은 탓이다. 가장 덜 이기적이고 덜 졸렬한 생명체가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천적들의 위협에서는 최대한 멀어질 수 있는. 고래나 상어로 태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바닷속에서 살아가기에는 인간들이 만든 배와 그들이 바다에 펼쳐둔 그물이 두렵다. 지느러미만 잘리거나 가죽만 벗겨지거나 치아만 뽑혀서 쓰레기처럼 다시 버려지는 삶은 아무래도 광활하고 심원한 바다에 몸 담고 살아가던 생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아픈 결말이다.
사실 새가 되고 싶은 건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은 욕망이다. 극제비갈매기는 북쪽 지역에서 주로 번식한 후 남극으로 돌아갔다가 번식기가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오는, 지구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다. 일 년에 칠만 킬로미터를 넘게 난다고 한다. 지구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이 보고 듣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아주 넓은 하늘을 아주 자유롭게 아우르는 것만 같아서 괜한 동경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정작 새들의 치열한 삶과 새들만의 세상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지만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로도 살아보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그래도 살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조건 삶을 치켜세우는 건 아니다. 죽음 또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 살아있는 순간만이 가치 있다고 한다면 죽음 이후의 존재는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하단 말인가. 죽음 그 자체에 주목할 필요성도 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 역시도 조금이나마 잘 살아가기 위함이다. 어쨌든 행복하고 싶다. 사랑을 받고 싶고, 안전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래도 살자는 건 어떠한 가능성에 기댄 말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값을 치르면서 갱생할 수 있고, 구부러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을 내버리고 올바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미성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과 생각을 쌓아가며 좀 더 무르익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삶에 주어진 가장 큰 특혜는 기회다. 뒤틀어진 것을 다시 바로잡아서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기회.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 저승의 존재 유무에 관해서는 산 자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으니 철저히 이승에 국한된 이야기라도 해도 말이다.
그래도 살자는 건 아무래도 행복해지자는 말처럼 들린다. 행복은 매달리는 순간 아주 멀리 떠나간다. 행복해지자고 염불을 외는 사람은 정말이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복이 뭐라고. 복권에 당첨되고, 전교 일등을 거머쥐고, 명문대학교에 합격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수익 전문직이 되어야만 행복한가? 행복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무수히 많은 무형태의 감정조차 어떠한 조건을 매겨 형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부자가 아니고 성적이 평범하고, 부모가 없거나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일도 잘난 구석 하나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자꾸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행복'을 배우며 산다. 외모와 성적과 재력으로 행복의 순위가 새겨진다니 슬픈 세상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불행할지가 결정된다니, 이보다 신이 더 전지전능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고픈 세상은 너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이야기.
내가 내뱉는 "그래도 살자"는 말은 더없이 무책임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삶에도 무책임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일과 관계와 삶에 무책임하다면, 그만큼 부끄러운 삶도 없겠다 싶어 어떻게든 책임감을 가지려 노력한다. 가장 좋은 일은 애초에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만 삶이 어찌 마음대로 흘러가겠는가. 살다 보니 책임자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건강한 몸과 마음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 자체가 상당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그러니 무책임하게 줄곧 살아가자는 말을 남긴다. 죽기 전까지는 죽지 말고 살자. 이왕이면 잘 살자. 통장 잔고는 반쪼가리가 나더라도 마음이 빈곤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배와 영혼이 둘 다 굶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래서 살자는 말은 무책임하다. 살아가려면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