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은 내가 그의 곁에서 세상의 자막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항상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만큼 그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에 마주한 세상을 설명해주는 해설자가 가진 눈은 곧 남편의 눈이 된다. 내가 설명하는 대로 세상을 꾸려나가는 남편에게 과연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길 위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 없기에 주요한 사항들만 이야기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뺀 이 설명들이 과연 저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표현력이 여기까지임이 답답하고 애석하다. 가끔 귀찮을 때는 설명을 빠뜨리기도 하는데, 하필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나는 혼자 머쓱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눈앞의 모든 것을 옆에 서 있는 이에게 다 설명해주고 싶었던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조금 지난 시간을 함께 해온 지금, 느낀 것은 지치지 않아야 이 사람과 오래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적당히 다른 이의 눈에게 맡기고, 기계에 맡기고, 그 스스로에게 맡기다 보면 나는 조금 덜해도 되지 않을까. 과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무거워진 내가 그의 손을 놓지 않게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큰 철학 말고, 아주 작고 구체적인 일들 속에서 이 책임감과 타협하고 있다.
목이 누렇게 된 그의 흰 티셔츠를 삶으며, 나는 한숨을 쉬고도 속으로 생각한다.
'아오. 그냥 입혀버려?'
사실, 남편은 이런 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티셔츠가 누렇게 변한 것도 모르니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나도 모른 척하기, 아니면 세탁소 직원처럼 조용히 일 끝내기.
몸이 편하냐, 마음이 편하냐 문제인데 결국 나는 마음이 편한 일을 고른다.
문제는 패션에 꽤 관심이 많은 그에게 이런 옷들이 참 많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몸은 불편하고 마음이 편한 일이 자꾸자꾸 늘어난다.
그런데 그냥..... 해야겠다. 이젠 그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위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으이그, 나한테 잘해라,
학씨 아저씨처럼 누런 티셔츠 안 입고 다니려면!"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며, 또다시 티셔츠를 삶는다.
아니, 왜 이렇게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