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일단 무작정 동네 한 바퀴.
돌이켜보면, 난 살면서 누가 뭘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잘 못했다.
'무슨 영화 좋아해?', '무슨 드라마 좋아해?', '무슨 음식 좋아해?' 같은 것들. 그런 질문을 들으면 도통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아, 난 원래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별로 없어서."
어느 정도 좋아해야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난 내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항상 순간의 느낌에 솔직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래서 표현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숨기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조차도 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를 수없이 질문하면서 도착한 영국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프레스턴에는 동양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한국어 대신 영어만 들려왔다. 내가 한 학기 동안 다닐 센트럴 랭커셔 대학의 풍경은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 풍경과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새로움이 나쁘지 않았다!
아, 나 새로운 걸 좋아했던가?
기숙사 입사일 전, 호텔에 머무르며 며칠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일단 무작정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이 새로운 곳을 돌아보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환경을 눈에 담는 소소한 도전을 해야겠다고.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갔다. 간판을 보고, 하늘을 보고, 자동차를 보고, 음식점 메뉴판을 봤다. 한참 걸어가니 물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이 나왔다.
한참 동안 거길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시원했다. 마음이 편했다. 그냥 그 순간이 좋았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유가 없어도 좋은 순간들이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걸 잊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공원에서 산책했다. 비가 온 다음이라 바닥이 축축했다. 신발에는 진흙이 잔뜩 묻었다. 영국에 오기 직전에 산 새 신발이 엉망이 됐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난 좋아하는 게 진짜 별로 없었나. 남들만큼은 아니라고 스스로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서 외면해 온 것은 아니었나.
아, 난 원래 좋아하는 게 별로 없어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이 대답은 나 자신까지 속인 새까만 거짓말이었다. 이날 하루 만에 정말 많은 '좋은 것'을 만났다. 그리고 이전에도 분명 나는 많은 것들을 좋아해 왔을 것이다.
전에는 뭘 좋아했더라. 나는 그걸 다시 기억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