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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Oct 07. 2024

歌痕 24. 가을의 것 - 다섯. 밥.

Massenet: Thaïs: Méditation

   쌀을 씻을 양푼에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채운다. 인원수 대로 쌀을 퍼서 물에 담그고 반짝거리는 서리태 한 줌을 넣는다. 손을 갈퀴 모양으로 쥐었다 폈다 하며 조몰락조몰락 쌀을 씻는다. 퀵 앤 소프트. 절대 박박 씻으면 안 된다. 물을 버리고 수돗물을 채운다. 쌀이 잠길 정도. 다시 조몰락조몰락. 물을 따라낸다. 쌀알과 콩알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버려진 쌀 한 톨이 지옥에서 곤장 한 대로 돌아온다. 다시 물을 받고 조몰락조몰락, 찌개나 국을 끓일 요량이면 이때 뜨물을 받아둔다. 마침내 쌀 씻은 물이 맑아질 정도가 되면 솥으로 쌀을 옮겨 담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채운다. 손등이 반쯤 잠길 정도로 찰랑찰랑. 삼십 분 동안 불린다. 서리태에서 말간 파랑물이 배어 나온다. 1분이라도 넘거나 부족하면, 상관없다.

나무위키에서 퍼왔습니다.

   가을은 밥심이다.

  시장이며 마트마다 햅쌀과 햇곡식, 온갖 과일이 나오고 기름진 먹을 것들로 그득하여 미각을 돋운다. 의학적으로는 일조량이 감소함에 따라 식욕을 억제하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어 입맛이 당긴다고 한다. 계절성 우울증 , 이른바 가을 타는 것을 먹는 행위로 해소하려는 욕구도 작용한다는데 아무튼  무엇을 먹을까 심려와 고뇌가 깊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밥이다. 윤기가 매끈하게 흐르는 갓 지어 찰진 밥에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 한 가지가 차려지면 그보다 푸짐한 밥상이 또 있을까?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나면 절로 힘이 솟고 기분이 좋아져 마음마저 너그러운 것이다.


  내게 최고의 밥상은 뚝배기로 오래 뜸 들인 콩밥 - 어느 종류의 콩이든 상관없다. 콩이면 된다  -  고봉 한 그릇에 겉절이 - 어느 종류의 김치이든 상관없다. 풀냄새가 상큼하게 코를 찌르는 아삭한 겉절이면 된다 - 가 차려진 밥상이다. 뜨거운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겉절이를 척 얹은 뒤 후우 후우 두 번 불고 심호흡하는 느낌으로 입에 넣는 것이다. 양 볼이 볼록해지게 입안에서 좌우로 씹으며 호오하고 뜨거운 김을 내쉬면 밥의 고소한 단맛과 푸성귀의 싱싱한 맛이 그야말로 오묘하다. 먹으며 나의 오른손은 어느새 새로 한 숟가락을 뜨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고봉 두 그릇이 거뜬할 게다.

구글에서...


  어린 시절 밥은 참 맛있었다.

  까마득한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어린 나는 짐작도 못할 이유로 집안 형편은 무너졌다. 엄마는 동양중학교 고개를 넘어 노량진으로 장사 - 라기보다는 행상 - 를 나갔다. 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저 멀리 보이는 서쪽의 언덕길을 내려올 때까지의 긴긴 오후. 나는 동생들과 함께 언덕 꼭대기 위로 길게 걸린 햇볕을 마주 보며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공상을 했다. 때때로 강아지풀이며 잡초들이 듬성듬성한 언덕길로 나가 누런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며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언덕 꼭대기에 엄마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보따리를 내려놓고 쌀과 보리를 섞어 씻었다. 집에 오는 발걸음 내내 4남매의 저녁 끼니가 걱정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미가 잘 안 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조리로 젓고 살살 뜨며 쌀을 이어 쌀겨와 작은 돌을 건져내었는데 옆에서 보면 신기하고 절묘했다. 학 두 마리가 마주 새겨진 은갈색 밥솥 - 양은이었을까? - 에 쌀을 담아 풍로에 안쳤다. 엄마가 반찬이며 국을 하는 동안 밥솥은 끓었다.  흰색 쌀거품이 솥뚜껑을 달싹달싹 밀쳐 올리며 용을 썼다.

  불구멍 막아라, 엄마 말씀에 풍로 아래의 구멍을 헝겊뭉치로 틀어막고, 영차, 밥솥을 들어 올린 뒤 가운데 구멍이 뚫린 철제 풍로 뚜껑을 연탄불 위에 덮는다. 다시 솥을 약해진 불 위에 얹은 뒤 오래도록 뜸이 들기를 기다리면 온 마당에 퍼지는 밥냄새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마침내 밥과 국과 반찬이 마법처럼 떡하니 차려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퇴근하시려면 아직 멀었다.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솥을 주걱으로 헤쳐 고루 섞고 아래쪽의 밥을 떠서 아버지 전용 밥그릇에 담았다.  도톰한 천으로 만든 밥주머니에 아버지 밥그릇을 넣고 카키색 군용 담요로 다시 돌돌 말아 싸서 아랫목 이불 안에 두었다.  엄마와 4남매가 둘러앉은 밥상은 단출했지만 늘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우리 4남매는 생일이 모두 음력 9월 초에서 10월 초 사이에 몰려 있다. 생일이면 엄마는 햅쌀밥과 고기를 듬뿍 넣은 진한 미역국, 유난히 기름냄새가 고소한 겉절이의 3종 세트로 생일상을 차렸다. 그때그때 잡채며 불고기 등의 특별 반찬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3종 세트의 기억만이 진하다. 아! 엄마가 횡액을 막아준다는 속설에 기대어 우리들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꼭 해주기로 결심하여 지켰다는 생일날 수수팥떡도 구수하고 선명한 기억이다.

구글, 고맙습니다.


  맛있게 밥을 떠 넣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어려운 살림에 고되었을 엄마에게 한 끼니 한 끼니는 얼마나 절실했을까. 밥 짓고 먹이고 치우고 일하고 다시 밥 짓고 먹이고 치우고 일하는 엄마의 시간 속에 자식들의 존재는 얼마나 애틋했을까. 엄마의 밥은 그래서 늘 실존이다. 지금도 전화하면 첫마디는 '밥 먹었어?'이고 '밥 금방 하니까 먹고 가라'인 것이다.



  통계부와 한국밥맛연구소, 민속문화대잔치연구원 등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밥의 종류는 총 150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백반(100)과 쉰밥(50)을 합쳐서. 죄송 ㅠㅠ


   옛날에는, 그러니까 지금처럼 쿠쿠와 쿠첸과 풍년과 조지루시 코끼리가 창궐하기 이전에는 집마다 밥맛이 달랐다,고 한다. 쌀 씻는 노하우와 밥물을 맞추는 노하우와 불의 세기를 다루고 뜸 들이는 방법의 노하우, 그리고 밥솥의 종류와 물성에 따라 밥맛이 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구글에서 퍼왔습니다.

  3천만 인구의 시대에 600만 가구의 수만큼 다양한 밥맛이 존재했다면 5천만 시대의 지금은 어쩌면 정말로 150가지의 밥맛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전기밥솥 메이커의 브랜드 수에다 햇반과 오뚜기밥등의 즉석밥, 그리고 소수의 가정에서 전설처럼 전수되고 있을지 모를 몇몇 집밥들의 수를 합친... 지나친 억측이고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밥을 지어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것에 익숙한  이른바 현대인의 생활 방식과, 그마저도 온전한 한 끼를 제대로 사 먹기에도 벅차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청년들을 보면 어느덧 집밥, 지어먹는 밥의 멸종 시대가 도래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하긴. 요새 짓는 청년주택에는 아예 주방을 설계하지 않는다거나, 특별한 날에 유튜브로 밥 짓는 법을 배워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새날이 곧 열릴 것 같기도 하다.




  집밥은 아니지만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행복에 겨웠던 기억 한두 개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밥 얘기 하는 김에 나도 살짝 숟가락을 얹는다.


  몇 해 전 친구와 전남 여수의 금오도 트래킹을 다녀왔다. 코스도 이쁘고 동백도 이쁘고 잔물결 일렁이는 바닷물(水)은 곱고(麗) 귀엽게 헤엄치던 상괭이들도 이쁘고 늙은 할매들의 깊은 주름에 실린 웃음도 이뻤다.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내려 밥을 먹기로 하여 식당을 물었다. 찻길을 건너 골목으로 백 미터쯤 쭈욱 들어가면 오른편에 백반집이 하나 있다고 했다.

  작은 식당이 있었다. 유리문에 막걸리, 백반, 보리밥, 서대회라고 쓰여있는 작은 식당. 백반 5천 원, 막걸리 3천 원. 백반을 시켰다. 밥과 시원한 된장국, 생선 토막, 겉절이 김치와 갓김치, 갖은 나물, 비벼먹을 손님을 위한 냉면그릇과 씻어 무친 김치, 참기름, 고추장 등이 넓은 오봉에 가득 차려졌다. 밥과 국은 셀프 무한 리필. 반찬도 무한리필로 주시는데 기본이 푸짐해 함부로 더 주세요, 못 한다.


  이런 맛을 표현할 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그저 먹는 내내 웃음이 났다.  반주를 곁들이다가 친구에게 말했다. 하루 더 있자. 저녁에 포장마차 골목에 가서 소주 한잔 진하게 하고 내일 아침에 여기 다시 와서 해장하고 올라가자.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고물가시대에 가격을 대폭 인상한 모양이다. 무려 20퍼센트나. 이렇게 폭력적으로 가격을 올려도 되나? 된다! 백반 6천 원이다. 여수 연안여객터미날 맞은편 골목 안에 있는 골목식당이다.



  속초 관광수산시장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길을 건넌다. 관광수산시장 제3문  방향으로 들어가서 77미터쯤 가면 TV에 나와 유명해졌다는 코끼리분식이 있다. 그 집을 끼고 우회전해서 28미터를 간 다음에 좌회전해서 8미터를 가면 왼쪽에 식당이 있다. 미니분식. 지금 영업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좁고 작고 낮은 집이다. 출입문 앞에는 채소 등속을 파는 할머니의 좌판이 있다. 식당 안쪽을 수상한 듯 들여다볼라치면 좌판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해! 그런데 아직 안 해.


  식당은 12시 좀 전에서 12시가 좀 넘은 시간의 언젠가 쯤에 문을 연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 할머니가 밥과 국과 반찬을 얼추 다 만들면 그때부터 손님을 받는다. 물론 미리 와서 앉아 기다려도 된다. 할머니 조리하시는 거 구경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조금 늦으면 줄 서서 기다리거나, 못 먹을 수도 있다, 이런.

  할머니처럼 늙은 조리 기구마다 오늘의 메뉴 반찬들이 볶고 굽고 무쳐진다. 고관절과 무릎이 몹시 안 좋은 할머니는 좁은 주방을 느릿느릿 이리저리 다니면서 더딘 손으로 음식을 만드는데 다 된 음식을 보니 손이 빠른 것이다. 밥과 국, 누룽지 기본 세팅. 매일매일 메뉴가 조금씩 바뀌며 즉석 조리한 여덟, 아홉 가지 반찬이 냄비며 큰 접시에 차려지면 어느새 좁은 식당을 가득 채운 손님들은 차례로 밥과 반찬을 큰 접시에 담아 먹는다. 그렇다. 바로 뷔페식 백반집인 것이다.


  식당이 좁으므로 최대한 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할머니는 손님들이 식사를 시작한 후에도 두어 가지 반찬을 계속 만들어 낸다. 기다렸다가 마저 먹고 가자니 줄 서서 대기 중인 다른 손님들에게 미안하고, 후딱 먹고 나가자니 아쉬움이 짙다. 아, 먹고사는 것의 생생한 안절부절이여.


  속초로 시집온 지 60년 가까이 되었다는 늙은 원주댁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고향 사람들이 그랬어. 돈 많이 벌어서 돌아와. 그런데 여적 못 갔어. 돈도 못 벌고 몸은 늙어서 못 가."

  내가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돈 많이 벌어서 고향 가기는 틀려 먹었다. 이렇게 차려내고 4천 원 받는다. 좁아터진 식당에 아무리 줄을 서봐라. 돈이 '많이' 벌리겠나. 음식이 맛있으니 찬이 담긴 냄비와 접시는 그나마 금방 바닥을 보여 손님을 많이 들이지도 못한다. 원주댁 할머니의 밥과 찬은 맛있어서 쓸쓸하다.

  원주댁 할머니는 손맛이 좋다. 게다가 재료를 푸짐하게 써서 바로 조리해 내놓으니 꿀맛이다. 주방 대 공개의 고급 식당이나 하늘까지 닿을 높은 모자를 쓴 셰프들이 세련되게 움직이는 레스토랑의 반짝반짝 뽀도독 소리가 날 청결함과 위생 상태에 길들여진 이는 출입을 금할 것을 권해드린다.  이 집은 눈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손맛과 정으로 먹는 집이다.


  역시나 이 맛을 표현할 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단지 한 가지 팁을 공개한다. 당신이 이 미니분식에 시간에 맞추어 방문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면 분명히 과식한다. 과식을 안 할래야 안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황하지 말고 원주댁에게 4천 원을 낸 뒤 왔던 길을 되돌아 관광수산시장 제3문 방향으로 조심조심 배를 부여안고 걸음을 옮기시라. 그곳에 서독약국이 있다. 효과 좋은 소화제를 정가에 판다. 카드도 된다!


 셈을 치르고 나오면서 사 갖고 간 드링크제 한 박스를 할머니에게 건넸다. 만 이천 원으로 이렇게나 과분한 감사 인사를 받을 수 있다니. 낙엽 태운 연기가 스친 것 같이 코끝이 살짝 아렸다.

  원주댁이요. 그저 아프지 마시고 천천히 오래오래 속초에서 식당 하는 거래요.




  가을은 밥심이다. 요새 체중이 과감하게 늘고 있다. 가을 탄다, 젠장...


https://youtu.be/718UdiQh0CQ?si=FCjeFkDszG_c_v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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