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치혜 Sep 26. 2024

歌痕 23. 가을의 것 - 넷. 경춘가도.

Bluer than blue.  When October goes.

   형, MT 답사 간다며?

   응. 

   누구랑?

   J가 여성의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러 같이 가주기로 했는데 못 가게 됐다고 아까 전화 왔네. 혼자 가야지 뭐. 답사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같이 가줄까요?

   그러면 도움이 되지. 근데 갑자기 괜찮겠어? 저녁 돼야 올텐데. 토요일 하루 다 날아가고.

   형이 밥 사주고, 집 데려다 주면 되지. 가자.

   아 귀찮네.

   뭐요? 안 간다!

   가, 가, 가. 

  

   근데 너, 나 혼자 가는 거 미리 알고 기다린 거 아니여? 어쩐지 수상한데.

   앗! 들켰다. 꺄륵 꺄륵.  

   

   농담으로 말했지만 S는 싫지 않았다. 아니, 반가웠다. 그런데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다. M이라서 였다.

   M은 도시적이고 화려했다. 당시 유행했지만 아무나 쉽게 따라하지 못했던 파라 파세트 메이져스 스타일의 사자머리에 제법 짙은 세련된 메이크업. 1년 후배인 그는 맑고 큰 눈에 밝고 높은 목소리를 지녔다. 활달한 성격의 M과 가끔씩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어찌나 또렷하게 눈을 맞추는지 마치 S의 속을 들여다 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입생으로 맞이한 처음부터 좋은 느낌을 살짝 가졌지만 선배로서의 위엄을 갖추느라, 는 아니고, 수줍고 겁이나 딱 거기까지, 스스럼없이 대했다.   

  

   '만에 하나 다가섰는데 그녀가 거절하면 어째야 하나. 쿨한 척하며 하하하 자식, 농담이지. 농담인 줄 알고 세게 나오는구나. 역시 M이야, 할까? 그 순간만 굳건히 버티면 돼. 그런데 내게 그런 연기력은 없어.'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오늘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하고 좋은 선후배로 잘 지내자, 할까? 말이야 겨우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그 어색함을 결코 못 견딜 게 분명해. 결국 도피성 입대를 하게 되겠군.' 

    

  '만에 하나 그녀가 좋다고 하면? 오홋! CC로 멋지게 지내겠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하며 꿈결 같은 청춘의 날들이 이어지리라.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운 듯 바라볼 거고 나는 왠지 으쓱 할 거야. 도서관 자리도 매일 잡아 주고 집으로 갈 때는 한강대교를 함께 걸어 건너자. 멀리 63빌딩 너머로 지는 해가 한강물을 주홍빛 노을로 길게 물들이면 우리도 주홍빛으로 얼굴을 물들인 채로 팔짱을 끼고 다정한 물결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 보면 슬슬 M이 내 부끄러운 부분도 알게 될 거고 사랑싸움이든 진짜 싸움이든 말다툼도 잦아지겠지. 아웅다웅 그래도 좋은 커플로 지내다가 나는 입대를 하겠지. 그녀는 고무신을 노끈으로 질끈 동여 묶고 내가 전역할 날만을 기다릴 거야. 암. 기다릴텐데... 평소에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무수한 남자들의 공략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질 거고, 그보다도 내가 상병이나 달게 될 때 쯤 졸업을 하게 될 재원인 그녀를 두고 셀 수없이 많은 맞선과 소개가 줄을 잇겠지. 심 청보다 효심이 깊은 M은 부모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 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울 것이고, 거기에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가 겹치게 되면... 결국은 내가 천사같은 M의 마음에 깊은 상채기를 내는 셈이잖아.

   안 돼.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


   S는 호감을 접었다.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마음이 지우개로 민 것처럼 개운해 질까. M의 동행 제안이 반갑고도 불편한 이유였다. 

   혹시 어쩌면?  

   

   둘이 중앙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는데 저 아래에서 K형이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답사를 간다고. 나도 가줄게. 마침 잘 됐네. 오늘 뭐하고 놀까 했는데. 하하하! 

    

   키 크고 얼굴이 뽀얀 귀공자 스타일에 너스레가 좋은 형이었다. 가끔 너무 좋아서 탈이었지만. 씀씀이도 호방해서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아, 형. 꼭 그래 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괜찮아. 하하하.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정말 붙지 마시라구요, 오늘은, 힝'

   M아 어서 가자. 날씨도 좋고, 아주 끝내주는 토요일이다 야. 하하하.

  '정말 끝장을 내 주시는구만요.'  


   하루 종일 그들은 셋이 붙어 다녔다. 아니 2+1, M곁에서 K형은 쉴새 없이 특유의 '이빨을 풀었고', S는 답사 본연의 일에'만' 충실해야 했다. 왕복 시외버스에서도 2+1, 식당에 가서도 2+1, 심지어 답사를 마치고 들른 주점에서도 2+1이었다.

   하늘은 파랬고 아직 낙엽 지기 전인 산색은 진녹색이었다. 경춘가도가 따라 달리는 북한강의 물빛은 하늘을 닮아 파랗다가 군데군데 산이 비쳐 짙은 음영처럼 보였다. 봄 여름의 강이 이와 다르지 않을텐데 어쩐지 차갑고 무거워 보였다. 

  

  

   졸지에 1이 되어버린 S를 경춘가도변에 늘어선 코스모스가 위로해 주었다. 진노랑색 꽃술을 떠받친 여덟 장의 꽃잎들이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 하늘거렸다. 흰색부터 짙은 분홍색까지 그라데이션을 이룬 듯  핀 코스모스들은 잠시도 가만히 서 있지 않았다. 차들이 슈웅 소리를 내며 지나칠 때마다 가련한 코스모스들은 몸을 누였다 세웠다 하며 심하게 흔들렸다. 멀리서는 줄기는 안보이고 색색의 작은 헝겊 조각들이 바람을 타고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에서, 학교에서 흔히 보던 꽃이었지만 이곳의 코스모스는 특별한 감상을 주었다. 바람을 많이 타서인가. 유독 키가 작고 여릿한데 흔들리는 진폭에 비례하여 강하게 보였다. 김수영 시인을 떠올렸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코스모스를 누이고 지나쳐 온 바람이 S의 코끝을 스쳤다. 하품 끝처럼 코 속이 싸하더니 살짝 눈물이 돌았다. 

    

구글에서 퍼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늦게 도착한 서울, M은 K형이 바래다 주었다.   

 

  https://youtu.be/qgPObAVK3G0?si=1HVDZVxmoBRrbm2m

"Bler than blue" Barry Manilow



   

   2학기가 시작되면 금요일 오후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 앞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덜컹대는 비둘기호 열차 안은 청바지와 과티 차림의 학생들로 아예 객차 한 량이 빼곡하다. 찐계란과 사이다를 나누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복학생들이 둘러앉아 벌써 맥주 한 잔씩이 돌았다. 긴 머리를 정성껏 앞가르마로 빗어넘긴 남학생이 심드렁한 듯 기타를 연주하면 한목소리로 노래가 이어져 객차를 채운다. 부끄러움이 많은 몇은 열차 창밖을 내다보며 무심한 척 하다가는 저도 모르게 후렴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다. 

   조금 전에 '열차 안에서는 고성방가를 하면 안'된다는 주의를 주고 다음 칸으로 건너갔던 차장아저씨가 다시 등장하자 기타와 노랫소리가 멈춘다. 모두 의자와 팔걸이에 분방하게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농담을 던진다. 누군가 창밖 풍경에 감탄사를 내뱉자 모든 학생이 창쪽으로 몰려 탈선할 판이다. 그것도 잠시, 차장아저씨가 다음 칸으로 가고 나면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서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모두 다 사랑하니 그것만이 내 세상인데, 아니 벌써' 비둘기호는 북한강가의 낡고 작은 역사에 들어선다.  

  

 

  한 봉지씩 챙겨온 쌀이며 김치, 엄마가 챙겨준 밑반찬 한 봉다리와 라면과 꽁치통조림이 든 박스를 낑낑대며 들고 내리는 남학생,  삼겹살과 소주와 막걸리가 가득한 아이스박스를 담당한 현역 선배들이 역 마당에 모인다. 직접 쓴 깃발과 현수막을 든 학회 간부가 인원을 체크한 후 각자 들고 이동할 짐을 분담한 행렬은 선발대가 기다리고 있는 민박집으로 향할 때 긴 머리를 정성껏 앞가르마로 빗어넘긴 남학생은 기타로 경쾌하게 행진곡을 선창하는 것이다.     

   넓직하고 왠지 축축할 것만 같은 낯선 방, 담뱃불 자국이 군데군데 새겨진 누런 모노륨 장판, 어느 대학 어느 과 몇 학번이 언제 이곳에 왔는지 알리는 낙서들이 써있는 낡은 벽지. 누군가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같은 작품을 남겼고 '취중불언 진군자(醉中不言 眞君子)' 나 '사필귀정(事必歸正)', '금란지교(金蘭之交)' 같은 휘호와 '독재타도', '산 자여 따르라'는 격문이 빼곡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선발대는 벌써 라면에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종이컵이 오가는 소슬한 가을 밤, 이쪽에선 곰발바닥 개발바닥 게임을 하고 저쪽에서는 긴 머리를 정성껏 앞가르마로 빗어넘긴 남학생 주도로 나즈막히 노래와 술잔이 파도를 탄다. 또 한편에서 열을 띠던 토론은 종종 육두문자가 섞인 논쟁 아닌 논쟁으로 이어졌고 분위기가 심각해지면 누군가의 중재로 비틀대며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봄 MT때 보다야 한결 노련(?)해 졌지만 여전히 여린 신입 여학생 몇몇은 모두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난 구석에서 같은 이불로 어깨까지 감싼 채 앉았다. 그녀들이 신기하고 조금은 겁나는 표정으로 온갖 방안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숫기없는 남학생들은 그 여학생들을 숫기없는 곁눈질로 한번씩 쳐다보며 서툰 술잔을 연신 비워낸다.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민박집 뒷마당에는 취중에 용기낸 서툰 고백과 이를 미리 알아채고 있었던 듯 1초 만에 돌아오는 그녀 혹은 그의 철벽의 언어 그리고 쿨한 체념이 교차한다. 이 모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박집 넓은 방 아랫목은 절절 끓고, 알코올 도수 25도의 진로 두꺼비는 차례로 속을 비우며 방 벽을 따라 나래비를 선다.      



   그 작고 낡은 역사 앞을 흐르던 강물은 추억의 모든 것을 품고  바다로 들어갔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화와 액화를 거치며 다시 그 작고 낡은 강변의 역사 앞을 흘러갈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강의 물은 여전히 유유하고 새롭다.     

   서울에서 청춘기를 보낸 많은 사람이 경춘가도와 연결되는 추억 하나쯤은 간직할 것이다. 특히 봄 가을의 MT를 경험할 수 있었던 혜택받은 대학생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봄의 서먹함을 품은 MT와 친숙해진 사이의 가을 MT는 달랐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 나는 가을 MT가 좋았다. 아마도 서른 번 이상 대성리와 청평, 강촌의 민박집과 나중에는 펜션을 섭렵하며 MT를 다녔다. 학과와 써클, 학생회 그리고 친구들과의 소모임 소풍으로 MT의 타이틀은 넘쳤다. 그러고 어느 때인가부터 MT는 끊겼다. 마치 친구 청첩장이 끊기고, 돌잔치 초대가 끊기고, 그대신 각종 부고와 자녀 청첩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내게 MT의 시대는 소멸하였다.


  서울에 접한 경춘가도는 교통 체증이 극심하여 198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왕복 4차로로 확장되었다. 주말에는 나들이길로 교통량이 증가하면서경춘가도의 주요 구간 교통 체증이 더욱 심해졌다. 경춘가도는 서울에서 가평을 거쳐 춘천을 연결하는 도로로 개설되었으나 증가하는 자동차 통행량을 홀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안으로 서울춘천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고속도로는 기존의 경춘가도와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 구간을 통과한다. 기능과 효율, 속도가 중시되는 요즘 북한강변의 키작은 코스모스를 완상하며 길을 떠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만이 마음에 간직했던 경춘가도의 어느 풍경의 지점과, 탕탕거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던 강변과,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던 포인트들은 잊힌다. 잊혀져 간다. 규격화된 휴게소의 풍경과 과속카메라의 지점들이 그 자리들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도변의 풍경을 보며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불편을 감수하며 MP3 파일 대신 LP판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고, 모처럼의 휴일 오후 책장을 넘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은은한 힘의 근원이 감성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어서 가을은 가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가을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던 경춘가도의 코스모스가 떠오른다. 가을에는 한번 경춘가도에 나서서 풍경과 추억을 감상해볼 일이다. 

      

P.S) 늘 그렇듯이 S는 나의 절친이다. 나는 결코 비겁하게 이니셜의 뒤로 숨는 사람이 아니다.


https://youtu.be/VwxrEmmWzdk?si=yzQ9jNFeIFMLFDAW

"When October goes."  Barry Manilow


매거진의 이전글 歌痕13-폐과(廢科)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