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앞에 가장 오래 앉은 날인가 싶었다. 크림을 바르고 파우더를 톡톡 누르고 입술에 틴트를 살짝 찍었는데, 거울을 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조금만 더 연하게? 아니, 너무 밋밋한가?' 다시 진하게 칠하기도 해보았다.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리며 혼자 민망해졌다.
머리도 문제였다. 평소와 달리 컬이 자연스럽게 물결치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도 뜻대로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모자를 쓸까? 반 묶음이 나으려나?' 이런저런 스타일을 시도해보다가 결국 양 손가락으로 깊이 넘겨 굵은 웨이브를 살려 놓으며 포옥~ 한숨을 쉬었다.
괜히 마음이 급해 시계를 몇번이나 쳐다보았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이니 모여서 작은 파티라도 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성탄절이다 연말이다 괜히 들떠서 북적거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집에서 책이나 읽어야지.
간밤에 사락사락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계획을 바꿔 눈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S형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교 앞 다방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토요일 오후에 혼자 다방에 들른다는 것이 이상해 보이기는 할 것이었다. '약속이 있었는데 바람 맞은 걸로 할까? 학교에 온 김에 2주 전 녹음을 부탁했던 테이프를 받으러 들렀다고 하자.' 명분이 그럴 듯 했다.
'그런데 그 얘기가 곧이곧대로 들리려나...'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커피 향이 풍겨왔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입구의 대형 거울에 비친 양 볼이 발그스레한 게 조금 거슬렸다. 얼굴도 발갛고 나름 신경 써서 코디한 코트도 붉은 색이라 S형 눈에 촌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아니야. S형이 그런 패션 센스가 있을리 없어.'
S는 그녀의 과 1년 선배였다. 과의 인원이 많지 않고 유난히 잘 모이는 특성이 있어 두루 두루 친하게 어울렸지만 S와 따로 커피를 마시거나 술자리를 갖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남들과 같은 선후배였다.
S는 결코 외모가 장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난이과도 아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는 운동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햇볕에 닳아 있었다. 투박하고 뻣뻣한 모습은 '세련'과는 남극에서 북극까지 만큼 거리가 멀었는데, 때때로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면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청바지와 과티셔츠를 주로 입고, 도무지 안 어울리는 삼촌 스타일의 잠바도 자주 입었다. 군대도 안 다녀왔으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니기도 했는데 제법 잘 맞는 모습이 묘하게 웃음을 자아냈다.
주로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가끔 진심으로 웃을 때는 몹시 부끄러워보였다. 공부에는 열심이 아닌 것 같았고, 운동에는 꽤나 열심이어서 체육대회 등의 자리에서 제법 돋보였지만, 전형적인 있는 듯 없는 듯 스타일이었다. 단지 과의 여러 일에는 적극적으로 역할을 맡아 적당한 내공과 리더십을 보이곤 했다.
M은 그런 그에게 묘하게 시선이 갔다. 느낌상 S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일 수도 있었다. S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M에 대한 칭찬과 호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한번 쯤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듯 들곤 했지만 M이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S가 이야기를 걸어오면 선심쓰듯 응해줄 요량이었는데 그는 엄두조차 못 내는 모양이었다. 으이구, 남자가, 선배가, 쯧쯧쯧.
눈 때문일까? 역시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일까? 왜 갑자기 S를 만나볼 생각이 들었을까.
오늘 S를 보러 온 것은 맞지만 그런 티를 내진 않을 것이었다. 무심한 척 이야기를 나누어 볼 계기를 만들까 해서 2주 전에 캐럴 테이프 녹음을 부탁했다. 그것을 받으러 온 것이라는 핑계 하나로, 마음을 숨기기로 했다. 어쩌나 보자. 내가 공연히 사람을 좋게 본 것일 수도 있어. 최소한의 용기도 못 내는 사람이면 더 두고 볼 이유도 없고, 속 빈 그저 그런 사람이면 더욱 더 그렇지. 당장 사귀어보려는 것도 아닌데.
음악실에 있던 S는 M을 보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M은 가볍게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고 음악실이 옆으로 보이는 벽 쪽의 자리에 앉았다. 노래가 몇 곡 흐르고 S가 M의 자리로 왔다. S는 녹음테이프를 들고 있었다.
"근데 무슨 일로 오늘같은 날 학교 앞에를 왔어? 약속 있나 보다?"
"아니야. 약속 같은 건 없고, 눈도 오고 해서 음악 들으며 책이라도 읽을까 해서 왔지. 오늘 같은 날 다른 데 가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듣기 어렵잖아. 그치만 설마 형이 내 신청곡을 안 틀어주겠어? 죽을라고, 하하."
"그래 잘 왔다. 듣고 싶은 거 적어 줘. 다른 때면 어림도 없지만 오늘은 한가하니까 틀어줄게."
'어쭈 웬일이지? 농담을 다 할 줄 아네.'
"별 약속 없으면 좀 이따 나 끝나고 길모퉁이 까페가서 소주 한잔 할까? 별 볼일 없는 사람끼리."
'어라. 제법 용기를 내네. 아니면 혼자 있으니 나름 챙겨주는 건가? 어쨌든 좋아.'
커피를 마시며 M은 S를 살짝 살짝 쳐다보았다. S는 M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데인 듯 급히 눈을 돌렸다. 벌건 얼굴과 왠지 부산한 몸짓에 당황과 부끄러움, 어색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말이야 쿨하고 쾌활한 척 했지만 M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순간이 어색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둘만의 시간은 처음이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렸다.
'무슨 말을 하지? 한잔 하자는데 괜히 좋다고 그랬나?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나중에 애들이랑 같이 볼까?'
스피커에서는 샹송이 연달아 흘러 나왔다. S가 자신을 위해 선곡했구나 하고 M은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목전인데 좀 신나는 노래 좀 틀지. 센스하고는.'
S의 타임이 끝난다는 오후 2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다독이면서도 M은 자꾸만 가슴이 두근두근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이 다른 때의 토요일과 다르다는 걸 M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기억도 희미하던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다. 겨울이 오면, 눈이라도 내리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흑백 텔레비전에서 흘러 나왔다. 많은 가스들이 번안해서 불렀는데 어린 나이에도 가사가 절절했다.
하얀 눈이 내려 온 땅을 덮는 날, 아다모는 이런 날을 침묵으로 가득찬 백색의 고독이라고 정의한다. 그 이유는 연인이 곁에 없다는 실존의 상황 뿐 아니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슬픈 두려움의 미래를 예감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우면서 애잔한 아다모의 목소리는 깊은 밤 하얗게 날선 고독으로 쌓이는 흰눈이라는 선명한 대비에 실려 슬프다.
Oldies but Goodies.
LP로 듣던 젊은 이미배 가수의 "눈이 내리네"를 좋아하고, "똥 발라 나 줘"라는 상투적인 코메디 연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