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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Oct 25. 2024

歌痕23-1.경춘가도 외전 上.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대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1984. 배따라기

   1984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토요일. 쨍 소리가 날 것처럼 맑고 추웠다. 밤사이 내린 눈이 전신주의 어깨와 전깃줄 위에 쌓인 채 얼었다. 햇볕이 그 위로 떨어져 잘게 부서졌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추운 날씨 때문인지 2층에서 내려다본 학교 앞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S는 지난 며칠 동안 정성 들여 녹음해 둔 캐럴 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볼륨을 올렸다. 녹음 상태도 점검해 볼 겸,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므로. 첫 곡은 José Feliciano의 “Feliz Navidad”. 다방 안에 흥겨움이 흘렀다. 허밍으로 흥얼거리며 걸레를 들었다.     

   예상대로 한가했다. 이런 때의 토요일이면 학교 앞 다방은 손님이 없었다. 죄다 명동이며 종로며 신촌 등으로 놀러 나가지 흑석동에 남아있을 리가 없는가 보았다. 이런 날이면 평소 신청곡에 치여 듣기 어려운 취향 위주의 곡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지만 시간이 더디 흐르기도 했다. 친구들이 오면 주말의 오후를 즐기련만 주말을 즐기러 부대 위문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문드문 아저씨 손님 몇이 들어와서 쌍화차나 율무차를 마시고 갔다. 신청곡이 없었기에 S는 옴니버스 앨범을 걸어놓거나 캐럴 음반을 걸어놓고 책을 읽었다. 점심 무렵에 학생 몇이 들어와서 갑자기 다방 안이 왁자해졌다. 크리스마스에 놀 궁리를 하는 1학년들이었다. 귀여운 것들. 무더기로 노래들을 신청하기에 선심을 팍팍 쓰며 차례로 LP를 걸었다.

   그때 다방 문이 열리고 M이 들어섰다. 붉은색 바탕의 체크 패턴 코트에 목도리를 둘렀는데 옷 색깔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쇼윈도우의 주인공인 예쁜 크리스마스 장식이 들어오느 것처럼 다방이 환해졌다. M은 음악실에 앉아있는 S에게 반갑게 알은체를 했고 S는 엉겁결에 오른손을 뻘쭘하게 들었다.

     

   웬일이지? 약속이 있나?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테이프를 언제 주나 했는데. 

    

   아침에 틀었던 테이프는 S가 M의 부탁으로 녹음한 것이었다. 캐럴과 샹송을 섞어서 60분짜리 공테이프를 채웠다. 음악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S에게 M이 어렵사리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일주일이 넘게 선곡을 하고 다방의 기기를 사용하여 녹음을 했다. 중간중간 지우고 다시 녹음하기를 몇 차례나 했다.

   당시에는 LP나 카세트테이프가 귀한 물건이었다. 많은 젊은이, 청소년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곡들을 골라 레코드 가게에 녹음을 부탁하여 애지중지 들었다. 친구의 생일 선물이나 연인에게 전하는 선물로도 인기였는데, 노래와 노래 사이에 연서를 녹음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완성된 테이프를 전해 주어야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캐럴은 12월 25일이 되면 이미 선도를 잃는 법. 크리스마스가 코 앞인데 전달을 못 해주니 S의 마음이 바쁘던 차였다. 잘됐다.     

   1학년들의 신청곡들을 바쁘게 처리하고 마지막 곡을 턴테이블에 얹으려는데 M이 신청곡 메모지를 넣었다. “그대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배따라기의 노래. 아무렴, 좋아하지! S는 1학년의 신청곡 LP를 들어내고 배따라기를 걸었다.     

   자리에 마주 앉아 S는 테이프를 내밀었다.


   지난번 얘기한 테이프야. 크리스마스 전에 못 주면 어쩌나 했는데 잘 왔다.

   형, 고마워. 그런데 상황이 이러니까 내가 테이프 받으러 온 것처럼 됐네. 그런 거 아니다.

   알았어. 근데 무슨 일로 오늘같은 날 학교 앞에를 왔어? 약속 있나 보다?

   아니야. 약속 같은 건 없고, 눈도 오고 해서 음악 들으며 책이라도 읽을까 해서 왔지. 오늘 같은 날 다른 데 가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듣기 어렵잖아. 그치만 설마 형이 내 신청곡을 안 틀어주겠어? 죽을라고, 하하.

   그래 잘 왔다. 듣고 싶은 거 적어 줘. 다른 때면 어림도 없지만 오늘은 한가하니까 틀어줄게.

   뭐야? 관둬라 관둬. 노래 안 듣고 만다 내가, 치.

   아니야. 당연히 농담이지. 다 틀어 줄테니까 적어 주고. 별 약속 없으면 좀 이따 나 끝나고 길모퉁이 까페가서 소주 한잔 할까? 별 볼일 없는 사람끼리. 

   그래 형.     


   오후의 다방은 온화했다. 실내의 공기는 한결 향긋하고 부드러웠다. 대형 난로 위에 얹힌 주전자에서 나른한 듯 김이 피어 올랐는데 그 때문일까 매일매일 보던 다방 안 풍경은 낯설게도 파스텔톤으로 보드랍게 채색된 것처럼 보였다. 

   S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해야하나 싶기도 했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난생 처음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받고 차마 뜯지 못하고 두근거리던 그런 기분과 흡사했다. 2년 동안 학과 선후배로 지냈지만 특별히 친밀하게 지낸 자리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이 그저 다같이 친한 선후배로 잘 지내왔다. 무심한 척 소심하게 속마음을 꽁꽁 감춘 채로.

   그런데 오늘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다른 약속은 없다고 했고, 내가 술 한잔하자고 말은 꺼냈는데 어떻게 해야지? 술 마시다 말 막히고 어색해질 텐데... 누구 부를 애 없나? 그 전에, 다방에서는 어쩌지? 그냥 혼자 음악 듣고 있으라고 놔두어야 하나? 내가 가서 같이 응대해야 하나? 그럼 또 무슨 말을 하지. 아 이것들은 왜 다들 군대를 가가지고 이럴 때 도움이 안되냐고. 그래도 처음으로 이야기도 하고 술도 한잔 하는 기회이니 고마운 일이지. 암. 성탄절을 맞아 앞으로는 제발 착하게 살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끝내 M은 혼자 앉아 음악과 커피와 책을 즐겼...는지, 어쨌을지, 그렇게 있었고, S는 안절부절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음악실 안에서 M을 바라보며 맡은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to be continued...     


https://youtu.be/crBVVxNkLhc?si=nvDaEuELVcRGUz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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