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 반. 경기를 마치고 나온 후배들을 다그쳤다. 너끈히 이길 상대였고, 이겼지만,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합 전에 선수들과 미팅을 했다.
형이 공식 대회 은퇴 경기를 못 했잖냐. 오늘 하자. 너희가 게임을 10점 이상으로 벌리면 내가 들어가서 슛 하나만 메이드하고 나올게. 형 은퇴식 하자.
경기 내내 리드는 하는데 점수 차는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내가 뛰는 건 둘째치고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막판 1분을 남기고서야 속공과 야투가 연달아 터져 비로소 10점 이상 벌어졌고, 은퇴 경기의 열망은 일장춘몽에 남가일몽으로 끝났다.
아무리 형 뛰는 거 싫어도 이딴 식으로 방해를 해. 나쁜 놈들.
형. 점수 조절하느라 저희 애먹었어요. 키득키득.
그래. 오늘 늬들 죽고 나는 재야 농구계 순국선열 될테다. 이리 와, 이 섀키들.
20년쯤 전 이야기. 종로 YMCA가 주최한 직장인 농구대회였다. 당시 최고 권위. 각 10팀씩으로 편성된 2개조가 봄부터 풀 리그로 예선을 치르고 결선 토너먼트를 거쳐 자웅을 겨루면 11월이었다.
예선이 중반을 넘긴 초가을 일요일, 우리 자이안츠는 두 경기가 잡혔다. 9시 반 첫 게임. 5시 반 마지막 게임.
감독으로 참여했지만 선수로서의 욕심도 진했다. 이길만한 경기에서 플로어에 서고 싶었던 바람은 끝내 무산. 나쁜 놈들.
두번 째 경기까지 인터벌이 너무 길었다. 해산했다 모이는 건 쉽지 않다.
형 집으로 가자. 가서 밥 먹고 쉬다 오자.
뭐 먹이실 거에요?
짜장, 탕슉 시켜 먹지 뭐.
감독님!( 이 타이밍에?) 꽃게 먹고 싶어요.(이 섀키가 미쳤나?)
콜. 콜, 콜~
선발대는 집으로 가고 나와 고참들 몇은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발.
보자... 애들이 열 넷에 제수씨들이랑 조카들까지 하면 스물 여섯. 아, 나까지 스물 일곱이니 인 당 두 마리 씩은 먹을 거고. 그럼 대충 쉰 마리, 키로에 서너마리 올라간다니 14키로, 대충 40만원.
추렴을 하고 부족한 액수는 응당 말 꺼낸 이의 몫. 집에서 혼날 일만 남았다. 꽃게를 포장해 주는 동안 소라며 해삼이며를 사는데 한 녀석이 외쳤다.
형, 가을엔 전어지!
아는 거 많아 배고프겠다 이놈아.
수조에 수백마리는 되어 보이는 전어들이 눈이 어지럽게 헤엄쳤다. 검푸른 등과 은색 비늘이 조명에 비쳐 현란하게 반짝였다. 귀가 밝은 횟집 사장님은 어느새 뜰채에 전어 몇 마리를 건져 올려 '들여가세요, 싸게 드릴게' 한다. 힘차게 파닥거려 물을 튕기는 전어들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귀 얇은 주제에 군침은 빨리 돈다.
주세요.
스티로폼 박스 대여섯 개를 들고 집에 도착하니 밥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내와 제수씨들은 쌀을 씻어 안치고, 반찬을 챙기고 찜통과 들통을 꺼내 닦아 꽃게 찔 준비하느라 바빴다. 후배들은 아침 경기를 복기하며 자신의 무훈을 뽐내느라 침이 마른다.
저것들을 확 마 그냥.
두 녀석을 불러 솔을 쥐어주고 게를 닦게 했다. 조금 전의 늠름과 용맹은 어디가고 무섭다고 난리다. 된장을 풀고 대파를 넣어 국물을 채운 찜통과 들통에 차곡차곡 게를 쌓았다. 가스렌지를 켜고 기다리면 끝.
게를 찔 동안 세꼬시로 먹을 전어를 손질했다.
꼬리부터 대가리 방향으로 칼로 비늘을 긁어낸 후 가위로 지느러미를 잘라낸다. 대가리를 등쪽에서 삼분의 이정도 자른 후 배를 갈라 잘 발라내면 대가리와 내장까지 한 방에 제거. 흐르는 물에 박박 씻어내어 키친타올로 물기를 닦아 채반에 받쳐 두면 준비 끝이다. 후배들은 교대로 와서 기웃거리고 몇은 가을 전어의 맛과 왜 가을에 전어를 먹어야 하는가를 열심히 알은 체를 한다.
왜긴 왜냐. 맛있으니까 먹는 거지.
손은 이미 전어에서 배어나온 기름기로 미끈덩거리고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른다. 회를 썰기도 전에 군침이 넘어간다. 목 부분의 두툼한 부위부터 시작하여 등에서 배쪽으로 사선으로 얇게 썬다. 두께는 3밀리 정도가 좋다. 옅은 살구색의 고기가 횡대로 정렬한다. 칼을 통해 가시가 잘리는 것을 느낀다. 전문가가 아니니 칼질이 매끄럽지 않은 것이야 당연지사. 그럼에도 의연하게 폼을 잡으며 썬다. 마치 이 자세가 스탠다드인 양. 이마에 한줄기 땀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경건한 정신일도이다.
왜 이리도 멋지단 말인가, 이 팔방미인이라니.
접시에 얼기설기 담는다. 다른 생선회와는 달리 전어 세꼬시는 가지런히 담으면 어쩐지 맛이 없다. 통깨를 한 꼬집 솔솔 뿌린다. 거실에는 아버지 제사를 모실 때 쓰는 큰 상 두 개와 작은 상들이 펼쳐져 있고 수십 개의 눈동자가 기대로 초롱초롱하다. 와사비와 간장, 풋고추와 마늘은 이미 대령이다.
와, 맛있어요.
고소해요.
선배님, 아니 어쩌면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아까비. 이따 시합만 아니면 바로 소주 한 병인데.
이런 때에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거리곤 '흉내 한번 내본건데 뭘, 하하'하는 것이다. 멋짐의 완성!
게껍질을 수북이 쌓으며, 전기밥솥과 햇반을 풀가동하여 점심을 마치고 후배들은 거실과 침실, 아이방, 옷방, 식탁 밑에서 난민처럼 잠이 들었다. 딸아이와 조카들은 티브이를 보고 나와 여자들은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거리들은 기름기로 미끌미끌 끝이 없는 것 같았지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만끽한 따뜻한 오후였다.
두 번째 경기는 무난했다. 타우린과 키토산, 오메가3로 무장을 해놓고 지면 안되지. 4쿼터 막판 2분을 남기고 꽃게와 전어 향응의 댓가로 전격 출전, 노련하고 세련된 폼으로 죽이는 타이밍에 슛...을 던졌으나 스매싱을 방불케하는 샷블록을 당해 오렌지색 농구공은 저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유니버설한 은퇴!
다들 마흔이 넘고 쉰이 넘었다. 사느라 격조하다. 그리운 얼굴들.
기억 속의 가장 먼곳에 남아있는 전어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그것이다. 아버지께서 몇 종류의 생선을 사오셔서 마당의 풍로에서 구웠다. 갈치며 꽁치며 귀하던 시절, 그중에 작고 납작한 생선, 전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익숙한 솜씨로 석쇠에서 굽는데 그 조그만 몸뚱이에서 기름기가 똑똑 연탄불 위로 떨어질 때마다 불꽃이 화~하고 일어났다. 유난히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돋구었다.
한 마당을 쓰는 이웃들께 구운 생선 몇 토막 씩을 돌리고 마루에 앉아 밥을 먹는데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톰과 제리"에 고양이 제리가 생선을 입에 넣었다 빼면 가시만 남아 나오는 과장된 장면이 있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한 토막을 들고 입을 대면 가시만 남았다. 한없이 부드러운 전어살과 코를 마비시키는 불맛의 고소함을 어찌 잊을까.
아버지는 마당으로 이웃한 옆집 아저씨들과 작은 평상에서 소주를 드셨다. 흰색 난닝구 차림의 아버지와 아저씨들의 얼굴과 목덜미가 점차 전어의 속살처럼 살구색으로 물들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5남매 중 셋째인 아버지는 시골 청년의 야망이 있었다. 서울에서 성공하여 고향에서 빛을 내리라. 한때의 짧은 성취 뒤에 좌절, 꿈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4남매의 아버지는 가난했고 쓸쓸했다.
가난한 사내는 쓸쓸한 법이다. 어느 별의 왕자는 쓸쓸할 때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쓸쓸한 사내들은 쓸쓸한 가을날 쓸쓸함을 잊기위하여 어울려 술을 마신다.
혼자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고 어울려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다. 홀로 여행지에서의 소주를 곁들인 국밥, 늦은 점심에 서둘러 후루룩대는 짜장면은 혼자이기에 맛있다.
전어는 여럿이 먹어야 제맛이다. 별달리 차리지 않은 소박한 상에 둘러앉아 세꼬시나 구이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헛헛함을 치운다. 1런 전 혹은 여러 해 전 가을의 이야기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