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는 여름이 깊어갈 때쯤 곱게 피어난다. 작은 종들이 나무에 매달린 듯, 중학생 소년의 주먹만 한 주홍빛 꽃잎이 짙은 잎새 사이에서 환하다. 꽃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꽃이 피어난 모습과 그것이 주는 특별한 감정이다.
능소화는 위에서 아래로, 담장을 따라 줄기를 타고 내려앉으며 핀다. 다른 꽃들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어 다소곳하고 단아하다. 작은 바람에 꽃송이가 고개를 살랑거리면 마치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네는 듯하다. 초가을 바람이 스칠 때까지 능소화는 그 모습으로 제 있는 곳을 환하게 해준다.
목련은 뚝뚝 떨어지고 동백은 툭 몸을 던진다. 때가 되면 능소화는 조용히 제 몸을 말려 사라진다. 내가 미처 안타까워할 새도 주지 않고서.
길을 가다 능소화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곤 한다. 곤충과 바람을 통한 번식의 섭리는 충분히 완성하였으리라. 그렇지만 그 섭리의 오묘함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능소화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있다, 고 한다, 는데 정말 그런지 종종 갸우뚱할 때가 있다, 세상 모습을 보면.
능소화는 자신의 절정으로 한 세계의 종언을 알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만개하면 곧 조락의 계절이 올지니 나의 가장 곱고 빛나는 모습 뒤에 이어질 새 세계를 떠올려 보세요. 가을이 세상에 달린 모든 것을 떨구고 죽임으로써 이듬해의 새 세계를 약속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멸종으로써 생명을 약속하고 떠남으로써 새 땅을 약속한다는 것을 알리는 조용한 전령으로 가을을 이끌고 오는 것만 같다. 더위에 시달려 처져 있다가 활짝 핀 능소화를 마주칠 때면 이쁘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그 선명하게 아름다운 주홍이 곧 스러질 운명을 써 내려간 주홍글씨인 것 같다는 데 생각이 이르면 잔잔한 아련함이 인다. 능소화는 내게 곱디고운 슬픔이다.
배롱나무꽃은 능소화의 슬픔의 정서를 이어받을 법한데도 그렇지 않고 씩씩하다. 마치 바통 터치를 하듯 능소화가 지고 난 후의 초록의 세상에 화려한 색감을 입힌다. 자글자글 주름진 작은 꽃송이가 모여 불꽃같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에 슬픔의 풍경 따위는 어른거리지 않는다. 진홍색의 꽃은 백 일을 핀다. 깊은 여름부터 제법 깊은 가을까지의 오랜 날, 여름을 기억시키고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꽃이 져도 아름답고, 씩씩하다. 목피를 스스로 벗겨내어 매끈한 피부에 흰색의 무늬를 입히고, 그것으로 생장하였음을 증명한다. 꽃잎을 떨구고 이듬해 여름에 다시 꽃을 피울 때까지 배롱나무는 묵묵히 나신으로 가을과 겨울을 난다.
수년 전 조경 관리 계약을 맺었던 사옥 터에 배롱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다. 7월이 다 가도록 세 그루가 잎도 듬성듬성, 꽃이 달리지 않았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몸살을 심하게 앓는가? 한참 안타까웠다. 이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고사하려는가. 원줄기와 가지가 앙상한 듯 애처로워 보였다. 주말과 광복절로 이어진 연휴가 끝난 아침, 약속이라도 한 듯 개화! 가을 내내 피워냈다. 다른 다섯 그루의 낙엽이 시작될 무렵까지.
꽃들은 터져 나왔다. 매일 아침 이 가지에서, 저 가지에서 새 꽃들이 뭉치로 터져 나올 때 내 마음속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고 시인은 이야기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감동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한여름의 고된 노동이 있었지만 경이와 찬탄으로 그해 가을은 시작되었다.
배롱나무꽃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배롱나무꽃과 능소화, 똑같이 가을의 조락을 예고하지만 하나에서는 슬픔을, 다른 하나에서는 그것과 정반대의 감정을 품는다. 얕고 좁은 경험에 기대어 흔들리는 중년의 줏대 없음이여.
2020년 호남지역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던 때 지났던 익산의 배롱나무 가로수길을 잊지 못한다. 햇살이 나른하던 한적한 오후의 도로에서 꽃들은 찬란했다. 정원이라 불러도 좋았다. 강릉 오죽헌의 배롱나무를 기억한다. 추위에 약해 충청 이남에서만 키울 수 있다고 알던 나의 얕은 상식을 깨는 아름답고 튼실한 배롱나무들이었다. 오죽헌 입구에서 뜰 안까지 가지마다 꽃뭉치를 가득 이고 선 배롱나무는 경내의 여러 전각과 어울려 그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올 9월의 햇볕은 여전히 과하게 뜨겁다. 아직인가 싶다가도 능소화와 배롱나무꽃이 지고 피는 모습을 보며 가을이구나 한다.
이 곡의 첫 순간을 잊지 못한다. 대학1학년 9월, 점심의 공강 시간에 교내 이발소로 머리를 깎으러 갔다. 텅빈 이발소에 이발사 아저씨는 졸다가 일어나 내 목에 흰 천을 감았다. 라디오에서는 2시의 데이트 김기덕이 흘러 나왔고, 이 노래와 함께 바리캉이 시작되었다. 좋았다. 그래서 지금도 1 of 최애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