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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Dec 30. 2023

歌痕13-폐과(廢科)의 추억

"흔들리지 않게"(미상)

    꽤 오래전 이야기이다, 

    영화 “사일런스(Silence)"가 개봉하자마자 보러 갔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앤드루 가필드, 리암 니슨 그리고 몇몇 일본 배우들 - 일본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 인상적이지만 이름을 외우는 일은 그보다 몇 배는 어렵다 - , 2시간 반의 런닝 타임. 정말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숨도 깊게 못 쉰 채 꼿꼿이 앉아 '응시'하다가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에야 비로소 영화관의 등받이에 힘없이 풀썩 기댔다. 


    차가움, 무서움, 답답함과 억울함, 갈증 등이 마구 뒤섞인 채 시커먼 구덩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감정이입했다. 극장을 나서자마자 서점으로 갔다.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찾아 값을 치르고 그 길로 카페에 앉아 읽어 내려갔다. 신국판의 300쪽짜리 책은 조금 전에 보았던 영화의 이미지와 얽히며 놀랍도록 빠르게 읽혔다. 영화는 철저히 책을 그대로 화면으로 풀어낸 듯 했다.


    책을 덮고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으로 털어 넣은 뒤 기억해 냈다. 어딘지 낯익고 그만큼이나 답을 찾을 수 없어 갑갑했던 이 ‘차가움, 무서움, 답답함과 억울함, 갈증 등’이 섞인 오래된 기억을.     

 

    대학 3학년 여름 전혀 예상치 못한 학내 문제 - 우리 학과를 비롯한 몇몇 학과의 존폐와 큰 변동이 걸린 - 가 발생했다. 15박16일 동안 대학 본관 건물에서 총장실을 ‘점거’하고 비폭력 철야 농성이 이어졌다. 나는 공동 대표를 맡았다. 

    민주화를 외치고 부조리, 불합리를 깨치자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대학가를 뒤덮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제5공화국의 위세와 폭력이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주장과 구호는 단 한 줄도 기사화되지 못했고 단지 “학내 불순 세력”,“데모만 일삼는 놈들”,“총장 스승님을 볼모로 잡는 무뢰배” 등으로 프레임이 씌워졌다. 


    학교 측과의 협상과 철야 농성이 두 갈래로 이어졌다. 협상단의 일원으로, 농성장의 지도부로 2주일을 지냈다. 강온의 양 면 전략을 병행하면서 나는 학교 측 방침인 폐과와 정원 조정의 전면 철회를 주장하는 “매파의 수괴”였다. 수십 장의 대자보를 썼고 수십 장의 현수막을 썼다.     

    농성 마지막 날. 1년 후 원상 복귀라는 학교 측의 마지막 조건을 놓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학교 측의 압박이 빨라지고 심해졌다. 지금 당장 이 안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그 조건마저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지도부의 오랜 회의와 교수님들의 중재 끝에 협상 조건은 수락하되 농성은 다음 날 오전에 합의 보고와 성명을 발표하며 마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양측은 사인을 했다. 대학 본부 건물에서 함께 고생했던 교수님들과 교직원들은 짐을 챙겼고 우리는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지난 며칠을 이야기하며 마지막 밤의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학 본부 1층의 교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곳곳에서 술렁술렁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농성장 앞 연못 뒤에 전경버스들이 자리를 잡았다. 노량진 경찰서에서 전경으로 복무하던 동기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급하게 연락이 왔다. 

    “오늘 밤 백골단이다.”

    교내 다른 써클의 선배, 동기들이 연락해 왔다.

    “일단 여학생들은 대피시켜라. 오늘 백골단이 들어온단다.” 

    

구글에서 퍼옴

    "쨍그랑.” 

    깨진 보도블록 조각이 우리가 모여있던 대학 본부 2층 유리창을 깨고 날아 들어왔다. 곳곳에서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비명이 터졌고 보도블록 파편은 계속 날아 들어왔다. 

    “즉시 해산하라”

    확성기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백골단이었다. 악명 높던 스노우 진으로 복장을 통일한.

    중재를 요청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학교 측에서는 버스를 준비해 놓았으니 지금 당장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면 남은 것은 강제 해산. 폭력이 수반된 유혈 사태는 불을 보듯 뻔했고, 조인을 마친 지금 칼자루는 철저히 저쪽의 손에 있었다. 이 비겁하고 불의한 상황 앞에 버텨야 하나 나가야 하나?     

    그날 밤 나를 노려보던 여학생 후배 몇의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제 나가자’라고 얘기하는 나에게 그들은 차갑게 대꾸했다. ‘변절이냐’고, ‘결국 우리가 진 거 아니냐’고, ‘다시 버티고 싸워 이겨 내자’고. 

    어쩔 수 없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나가자고 사정했다. 그들의 팔을 붙잡고 반강제로 데리고 나가 버스에 태웠고, 그들은 울었다.


    마치 신파 드라마처럼 비가 내렸다. 새벽 한 시쯤 학교에서 대절한 관광버스가 우리를 토하듯 내려놓은 곳은 지금의 삼성동 코엑스 뒤편이었다. 빗줄기 속에 불이 켜진 곳이 거의 보이지 않는 칠흑의 허허벌판이었고 모텔들의 붉은 네온 간판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지치고 분노로 허탈한 백오십여 명의 학생들이 한곳에 묵을 숙소를 찾아야 했다. 네댓 군데의 모텔을 돌아다닌 후에야 겨우 그 긴 밤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 어떻게 했을까? 그때의 나라면 내가 지금 마주치는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누구나 두 개의 세계 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한다. 소설 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강한 사람들은 그 강인한 정신력으로 승리하고, 형장의 이슬이 된다. 그들의 이름은 빛나고 한 차원 높은 곳에서의 상찬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들에게 비난만 할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을 감내한 채 대의의 선택을 했다면. 인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정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는 소설 속의 페레이라 신부나 로드리고 신부의 경우처럼 말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나’는 늘 모든 결정에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 왔을까. 철학적인 존재로서 ‘나’는 그러했을까. 어느 경우에든 나는 과연 합당한 확신과 견고함을 지닌 것일까. 나라면 과연 어느 쪽이든 상황을 선택한 스스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오래전 글을 읽다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어찌 보면 내몰린 처지의 결정이었다고 평해 보지만, 역사를 통해, 주변의 생활상을 통해 이렇게 주어지는 시험의 많은 예를 보게 된다. 때로 분노하고 때로 공감하지만 그 문제지가 바로 내 앞에 펼쳐진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을 쓸 것인가? 아직도 질문만 존재한다. 부끄럽게도.   


https://youtu.be/-EXfLWoCf5c?si=yjo9iszpL0j2Aqd-

  https://youtu.be/HtbwncJw8zU?si=zZ7O1Afkc-1fkU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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